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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내가 쓴 글.

내가 겪은 6.25전쟁(1)

by 우 송(又松) 2014. 6. 5.

내가 겪은 6.25전쟁

 

 

 

 

내가 신병으로 보병8사단 16연대 2대대에 배속된 1952년 6월에는

8사단이 동부전선 향로봉일대 전투에서 진지교대후 양구에서

부대정비및 훈련에 임했던 때이다

신병으로 바로 최일선에 배치되지않았던것을 다행을 여기던중 어느날

전방으로 부대이동하기 전날밤에 중대단위의 회식이 있었다

중대의 임시막사 앞 게울에 가마솟을 걸어놓고 고기국을 끌여서 소주와 막걸리를

마음끝 마시며 노래도 부르고 한바탕 즐거운 자리가 벌어젔었다

특히 새로 배치된 신병들에게는 엄삼하게도 중대장께서 손수 막걸리를 한대접씩

따뤄주며 사기를 북돋아주곤 하였다

처음 마셔보는 술에 취해서 나는 학생때 뽑혔던 웅변실력을 다하여

전 중대원들앞에서 열변을 토하여 환호와 박수를 받기도 하였는데...

술에 대취하여 개울가 바위틈에서 잠에 떨어저있던중 회식은 끝났고

중대복귀할즈음에 신병1명의 탈영으로 중대가 발칵 뒤집혀 있던중

술에서 깨어나 야반에 어슬렁 어슬렁 소대막사에 들어가니 또 한번 야단법석이었다

김영포 소대장님이 껴안으며 반가워하며 중대장앞에 대리고가니

김정환중대장님 역시 살아서 돌아온 사람 반기듯 반가워하시는데

영문을 몰랐던 내가 알고보니 탈영병으로 이미 탈영보고까지 돼있던 상태였다

최일선에서 탈영하면 월북까지 이어질것을 감안한 신속한 대처였으리라.

 

우리부대는 수도고지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수도사단과 진지교대를 하였는데

수도고지일대의 산은 가파르고 험준한 악산이었다.

야반에 주저항선으로 올라가는데 포탄사격에 바위가 부서저서 골재장에 싸인 자갈적치장에

올라가듯 엉금 엉금 기어서 겨우 겨우 올라가는중 악취와 써치라이트에 비치는 쓸어진

거목등 살풍경에 놀라면서 진지교대를 하였는데

훤하게 날이 밝는 미명에 주위를 살피곤 아연실색하였다. 신병이 콱 기가 질려버렸다.

자갈 퍼 담은 마대 몇 개씩 싸아놓은것이 초소이고 중 소대의 지휘소이고

초소간 이동하는 교통호라곤 바위산이니 아예 팔 수도 없고 당장 적의 소총 저격에

능선에서는 몸을 숨길 곳 없고 몸을 엎드린체로 펼 수 조차 없었다.

날이 샌 새아침에 어설픈 신병 전우 둘이 벌써 적의 조준사격에 쓸어젔다

철모아래 뒤통수에 직격탄을 맞은것이다

또 주저항선에선 엠원소총은 최소한의 자위무기일뿐 적 기습에 응사하기엔

미흡한 개인화기였다

나는 용감한 신병으로 소대장에게 이미 인정받았음으로 소대장이 (똘똘한 놈으로)신임하고

분대의 BAR 소총 조수가 되었다, BAR소총은 엠원소총실탄 15발을 장착한 탄창 탄통을

무수히 휴대할 수 있어서 주저항선에서 적을 응시하고 있으면서도 저윽이 안심이 되었었다

주간엔 BAR소총을 거치해둔체로 야전삽으로 내 몸을 숨길 참호를 파고 자갈마대를

쌓곤하면서 차차로 엄폐처를 넓혀나아갔지만

그 지긋지긋한 밤이 되면 사격자세를 흐트릴 수 없고 귀를 세우고 있다가 어느순간에 사격이 개시되면 밤새도록 사격을 퍼 부었다.

그러던 어느날밤에 격전이 벌어젔다, 병력이 총동원되어 사선에서 사격을 퍼부어댔는데도

적병들이 꾸역꾸역 기어 올라왔다

대낮같이 밝은 써치라이트 조명아래 꿈틀대며 기어 덤비는 적병들을 목격하니 겁을 먹기도 했지만 미친듯이 BAR소총을 쏴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앞에 포병지원 포탄은 작렬하고 통통통통 수냉식기관총에선 예광탄만 사격하듯

눈앞 적병에게 총탄이 꼬치는데도 이리뛰고 저리피하고하면서 내 바로 앞까지

밀려들지 안는가,

순간 여기서 한발작 물러서면 전선은 무너지고 바로 후퇴로 이어진다는 기민한 판단에

사력을 다해서 쏘아댔고 내가 던진 수류탄도 열발은 넘었었다

밝은 조명아래 끊임없이 낙하 작렬하는 포탄과 좌우 기관총의 엄호사격에 용기를 얻고

최후저지선에 고정 거치한 BAR소총이 움직이는 적병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적은 한발작도 전진할 수 없었다.

눈앞의 적병의 사격이 뜸해지니 아군 사격도 간헐적으로 줄고 이내 포지원사격도 끊겼다

이렇게 한달여간 야간작전만이 지속되니 방어와 전투에 자신이 붙고

또한 전투대비에도 이골이 났었지만 이렇게 전투를 치루고난 어느날 아침에

나와 사수 조수하던 전우(전남 해남 출신으로 나만큼 용감해서 소대에서 신임을 얻었던 김(후동?) 이등중사)가 적의 저격탄을 맞았다

목 뒤에 직격탄을 맞아 후송의 겨를없이 상처에서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쪽 비탈면으로 운반해다 놓고 위생병(서울 돈암동거주 김성종이등중사)과 속수무책으로 임종만 지켜보곤 눈물만 흘리다가 내가 통곡을하니 위생병도 울고 지켜보던 전우들이 모두 울었다. 심지어 중대부관 임철호중위님도 주먹으로 눈물을 흠치는것을 보았다

용감하다고 그래서 전초기지 수색작전에도 유달리 뽑혔던 김중사(당시계급호칭)이기 때문에 그렇게 전우들이 모여서 눈물을 흘렸던가

여늬 전우의 죽음을 보거나 들었을땐 일시 침울했다가는 바로 잊혀지고 말았는데...

 

일시 전투가 소강상태일땐 초소병을 제외하곤 전병력이 마대에 자갈을 담아 교통호와 진지를 보강하고 무엇보담 우선적으로 거이 전신이 노출된체로 있던 적군시체 몇무더기를 한곳에 모아 가매장하니 내뿜어 질식지경이던 악취가 가셔저서 견딜만했고

식사당번이 전 소대원의 수통을 한꾸러미로 묶어 어깨에 메고 탄착지점을 벗어나서 있는 취사장까지 내려와서 세수를 하고 주먹밥 탄통을 메고 올라가 그런데로 따신 식사를 할 여유까지 생겼는데 당번이 수통과 탄통을 메고 쏜살같이 고지를 내려가는 장면을 지켜보던 소대원들은 달랑달랑 수통소리가 점점 멀어지면 고지를 무사히 나려간 것으로 안심하는데 용케도 식사운반시간쯤엔 우리쪽 계곡으로 적 포탄이 쓩-펑 하고 산발적으로 날아와서 낙하지점 주변에 있던 전우가 시체도 수습못할만큼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도 시체를 수습 후송하겠다고 탄착지점 주변까지 나려가서 살펴보면 다만 웅덩이만 생겼고 인근 바위벽엔 선혈만 튀어 묻어있고 또 모래 자갈이 바위벽에 박혀있는것을 보았다

폭풍이 모래자갈을 쏘아서 바위에 명중시킨 셈으로 모든 바위들은 흉하게 얽은바위들이었다

이런 경우 전우의 철모는 심하게 우굴어저 있고 쳇바퀴마냥 구멍이 숭숭 뚤려있게 마련이다

 

야간 전투시가 아니고도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저격탄에 의한 즉사가 많았지만 전방 수색작전중 지뢰에 의한 사망 부상도 많았고 포탄의 파편과 폭풍에 의한 사망은 참으로 참혹했고 완전한 시체를 수습할 수가 없었다

부상자와 전사자는 주차장까지 신속히 후송하는데 전사자는 들것이나 대용품에 단단히 묶은체로 앞에서 두사람이 끌고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면 되었지만 부상자 후송은 위생병까지 동행하는데도 후송사역은 직속 상하급 관계자까지도 은근히 기피하였는데...

 

밤마다 인민군이 기습하는데 포 사격지원을 받으며 밤세도록 쏴대며 저항했지만

유달리 우리소대 전방에는 매일밤 기습이 집중되어서 우리 전방 비탈면이 좀 완만하고 쓰러진 고목들이 뒤엉켜있고 조명탄의 낙하산이 전 지면을 덮다시피 널부러저있어서

엄폐 차폐가 쉬웠던 탓임도 알게 되었다

우리분대 참호옆엔 포격 관측을 위한 관측장교 참호가 있었는데

이 관측장교(이 모 포병소위)와는(비록 소위와 일병사이였지만) 참으로 친숙하였다

이 참호엔 식수 건빵등 수시로 먹을게 있었고 낮 한때 서로 오래도록 대화할 말동무였었다

내가 김영포소대장에게 건의한대로 관측장교가 주간에 탄착점을 미리 조준해 사격지휘

해 본 결과 바둑판에 바둑알 놓듯 요소마다 포탄이 작열하는데

이래서 야간전투가 좀 쉬워젔고 전투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참으로 공중과 지상의 화력의 우열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체임을 실감하였다

 

그런데 이 관측호에는 포탄장약으로 불을 때서 호 안이 언제나 훈훈하였었다

장남감 콩주머니 같은 장약봉지를 호 구석에 싸아두고 불을 땠었는데

이 장약에 인화되어 폭발하면서 관측장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전신화상으로 후송할 틈도 없이 죽어가는것을 목격하고서는

내옆의 전우의 죽음을 본것 보다 더 참혹했고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놀랜 가슴 진정할 수 없고, 내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밀려와 견딜 수 없을때는...

지금도 그때의 참상이 떠오를땐 몸서리가 처 지곤 한다

 

수도고지 입성이래 어언 6개월쯤, 눈은 싸여있고 누빈 방한복이 추위를 감내키

어려웠던 12월의 년말에도 총성이 멎은 한 순간에는 판초우의로 덮은 분대막사 보다

따신 양지볕 아래서 햇볓을 쪼이며 몸을 긁어대며 졸음을 즐기고 했던때

그 양지볓을 같이 쪼이며 임철호부관님과 사담을 나눈적이 있다

그분은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음악도라고 알고 있어서 일선 지휘관보다 군악대를 지휘할 군인이라고 내가 마구 말했고 또 나는 자칫 자손이 절손될 누대독자라는 사실과

그래서 점점 생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는 사실도 실토하기까지 하면서 서로 심정적으로 통하는 사이였었다

그런 연유로해서인지 1952년 12월말경 나는 중대에서 떠밀려 사단에서 시행하는 사병출신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했고 12월25일 크리스마스인가 하느날 중대원의 환호속에 같이 동행할 위생병 김성종중사(돈암동거주)와 함께 고지를 굴러 내려왔다 “저 아래까지만 내려가면 나는 산다”...저절로 발이 미끄러지고 몸은 웅크러들어 저절로 굴러지는데...

 

총알같이 달려 내려와 대구 5보충중대에서 화차에 실려 광주 보병학교에가서

53년 1월1일 밤중에 삭발하고 1월2일 입교해서 최소한 6개월간 생명이 보장되는

갑종간부 48기(M중대) 간부후보생이 되었다.

 

아~~ 지금 그곳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수 많은 생명을 삼켜버린 지옥도 지금은 지금은 다시 우거진 심산 유곡이 되어 있겠지...

다시 한번 그곳에 가 보고싶어서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전몰장병 영혼에 삼가 배례하고싶어서

몇년전에 그곳을 찾아가겠다고 수도고지의 위치를 전쟁기념관에 물었더니 휴전전 마지막 전투에서 적에 빼앗겼단다

내 전우의 영혼도 무주고혼이 되어 구천을 맴돌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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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실명을 그대로 적은것은 그때 그분들을 또 다시 만나봤으면..하는 염원에서 임

 

**잊혀지지안는 기연 한 토막.

신병들에게는 다만 엄삼하기만 했던 경상도출신 김정환 중대장님을 해후한 이야기

공병소위로 임관한 나는 휴전후에 미 군원 복구공사(AFAK)로서 홍천농고신축공사의

소요자재를 GMC 20대로 여러날 영등포 미 공병보급소(ESP#3)에서 홍천으로 수령 운송하였는데 홍천인근에서 보병부대 행군을 만나서 서행하던중 도보부대 인솔하던

김정환대위님을 알아보고 차에서 뛰어내려 인사하고 반갑게 만난일은 희소한 기연이기에

잊히지 않음.

**그후 부산 공병보급소(EBD)에 근무할때 부산시내에서 만난 우측다리절단 옛 전우의 말에 의하면... 하룻밤사이에 7중대 병력 반이상이 적의 집중포화에 희생되었다고...

끈질긴 생명때문인지...천운인지...수 없이 겪은 아찔 아찔했던 순간들의 환상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대전 유성구 어은로57 한빛(아)137/107호 이헌영. 010-5226-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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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忠詩.hwp

 또 현충일을 맞아 그때를 추념합니다.

유월,  호국 보훈의 달에 !!

내가 호국의 魂이 될 뻔한 그 순간순간들이

유월이 되면 더욱 또렷이 되 살아난다

수도고지, 내가 밟고 지나온 바로 내 등뒤에서

"펑" 소리 한방, 파편 한조각에 풍비박산한 그

밤 세도록 쏟아 붓듯 쏘아대다가

이제는 지켜냈다고 뿌듯하게 기지게 켜다가

저격의 과녁 되어 퍽 하고 쓰러지고

쑤셔대는 총상에 날 껴안고 울부짖다가

일순에 유명을 달리한 그대와 또 그대들..

지금 막 겪는듯한,끔직한 환상으로 되 살아온다

 

혈육의 정보다 더 찐했던 내 전우들

활짝 피지도 못한 애송이 들아..

이제는 진토 되고  한줌 흙먼지되여

뜨거운 바람으로 내 얼굴을 스쳐 가느냐!!

육십 년 지난 지금도 뭉클뭉클 그대들 떠오른다

오! 그대. 그대여 잘  잘 잠 드시라.

 

피 흘려 나라 지켰다는 알량한 自慰도

死地에서 겪은 九死一生의 武勇談도

6.25를 貶毁하고 否定하는 世態에선

평화 통일의 훼방꾼으로 눈총받고

좌경 친북세력과 민주화 유공자(?)앞에서

熱血 색채는 바래고 뒷전으로 떠밀려났는데

투덜투덜 메아리없는 쓴소리 해서 무엇하랴. 

             대전 유성구 어은동 한빛아파트 137동 107호  이  헌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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