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 代 來 歷 解 說
우리 全義 禮安李氏의 始祖 太師公 할아버님은 諱字 돗대도자(棹) 로서
약 1000년전 高麗國을 創建하신 高麗太祖께서 남쪽나라를 정벌하실떄 錦江이 홍수로 넘쳐 건널수가 없는 것을 이어른께서 渡江策을 主導하신 功이 있어 賜名을 돗대도자(棹)로 받으시었으나 처음의 啣字는 치(齒)자 이었습니다.
이 어른의 벼슬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통합삼한개국익찬공신 (統合三韓
開國翊贊功臣)으로 勳爵된 고려태조의 策勳詔書가 波平尹氏의 族譜에 轉載되어 전해 나려오고 있습니다.
始祖墓所는 忠南 燕岐郡 全義面 柳川里(良閒) 李城山下에 모셔있고 先塋의 守護를 위하여 累代 전해나려온 永思齊 齊室을 금년(1996년)에 山所案山에 全國子孫獻誠金약17억원(未精算)
으로 우람하게 聖域化하여 永遠토록 子孫의 敦睦의殿堂(7棟)을 이루웠고 (竣工慶祝大會96.6.23.)
始祖이하 2世부터 8世3兄弟分(大司成公.文莊公.典書公)의 祭禮를 모시던 追遠壇은永思齊에 祠堂 경원사(景遠祠)를 새로짓고 춘향날(음3월3일)(秋享墓祭음10월2일) 始祖를爲始하여 8世3兄弟分까지 十位의 春享祭禮를 처음 올렸습니다.
始祖의 아버님이신가 할아버님이신가? 考證이 確實치않은 태사공의 先山이 公州市 新官洞
옛말로 장깃제나루건너 宗山에 墓碑가 “全義李太師先山”인 墓所에 음10월1일(전의추향前날)
秋享祭를 올리고있으며 齊室 永慕齊境內에 태사공선대의 德行을기려 唐僧朱昊(중국스님)께서 “금강물이 마르지않는한 자손이 번성한다”는 명당묘터를 정하여주신 禪師를 모시는 古朴한 石佛 한位를 모신 祠堂이 전해나려오고 있습니다.
7세조(仟)께서는 高麗高宗年代(1256년)에 水軍을이끌고 蒙古兵을 무찌른 史實이 高麗史記錄이있어 지금도 海軍軍艦에 李仟艦이 있으며, 8世 3兄弟分중 仲派 文莊公(諱:混)께서는 高麗
高宗年代(1252년)에 나시어 忠宣王代(1312년.壽:61세)까지 壁上三韓僉議政丞으로 致仕하여
禮安伯으로 封했고 文莊公이라 諡號받으심이 高麗史節要(546페이지)에 記錄이 있고
9世(諱:彦昇) 10世(諱:翊) 11世(諱:昪) 12世(諱:竦) 4代와
13世 兄弟分(諱:蕆.翼襄公. 諱:韞.吏判公) 까지 5대 6位分의 壇所를 서울 노원구 월계동
恪心祠에 모시고 매년 음3월7일과 9월27일에 吏判公派 主導로 春秋香火를 올리고 있는바
元來 恪心祠地域(옛 楊州.道峯山下)은 禮安李氏(吏判公派)의 先瑩域으로 吏判公派의 累代의
山所가 뫼셔져있고 傍16세조(吏判公曾孫) 左議政公(諱:蓂.諡號:貞簡公)의 오랜 神道碑가 서울市指定 文化財로 保護되고있어서 서울 都心속에서도 先山墳墓와 이번에 세로이 重修된 恪心齊
(追遠祠.崇德堂.恪心齊.貞簡公神道碑閣.內外三門)는 우리 禮安李氏의 象徵이고 자랑입니다.
13世祖(憲字20代祖)翼襄公께서는 李朝 世宗祖代(1376년~1451년.壽76)의 名臣으로 그功蹟이 지금에도 빛나 陸軍士官學校에 翼襄公의 功蹟을 기리고 이어받자는 뜻에서 科學館을
“翼襄館”이라 命名하였고, 1993년4월을 “李蕆의달”로 政府가 記念하고追仰한 어른으로,이어른의
玄孫이신 17世(諱:沆)從仕郞公께서 李祖中宗年代(서기1510년頃)에 落南하시어 뿌리내린 報恩에 13世부터 16世까지 4대를 設壇하여 모시던중, 1945년 解放直後에 報恩 암소바위에
翼襄公의 神道碑와 碑閣(追遠閣.諭書閣)을 創建하고 壇所도 따로모셔 음3월9일(完定日)에 春享을 모셔 나려오고 있습니다.
쇠실壇所3代(14世~16世)의 壇祀와 落南하신 17世 從仕郞公부터 20世(諱:晶.憲字13代祖)까지4대의 墓祀를 매년 음10월2일 全義 秋享後 첫日曜日에 올리면서 이하 나뉘어진 각小門中의 享祀도 아울러모심으로서 이날은“崇祖의날”이자,흐터져있는子孫의 “맞남의날”로 定着되었습니다.
96年7월 33世.(翼襄公20代孫) 憲 榮 謹稿
先 代 來 歷 解 說
우리 全義 禮安李氏의 始祖 太師公 할아버님은 諱字 돗대도자(棹) 로서
약 1000년전 高麗國을 創建하신 高麗太祖께서 남쪽나라를 정벌하실떄 錦江이 홍수로 넘쳐 건널수가 없는 것을 이어른께서 渡江策을 主導하신 功이 있어 賜名을 돗대도자(棹)로 받으시었으나 처음의 啣字는 치(齒)자 이었습니다.
이 어른의 벼슬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통합삼한개국익찬공신 (統合三韓
開國翊贊功臣)으로 勳爵된 고려태조의 策勳詔書가 波平尹氏의 族譜에 轉載되어 전해 나려오고 있습니다.
始祖墓所는 忠南 燕岐郡 全義面 柳川里(良閒) 李城山下에 모셔있고 先塋의 守護를 위하여 累代 전해나려온 永思齊 齊室을 금년(1996년)에 山所案山에 全國子孫獻誠金약17억원(未精算)
으로 우람하게 聖域化하여 永遠토록 子孫의 敦睦의殿堂(7棟)을 이루웠고 (竣工慶祝大會96.6.23.)
始祖이하 2世부터 8世3兄弟分(大司成公.文莊公.典書公)의 祭禮를 모시던 追遠壇은永思齊에 祠堂 경원사(景遠祠)를 새로짓고 춘향날(음3월3일)(秋享墓祭음10월2일) 始祖를爲始하여 8世3兄弟分까지 十位의 春享祭禮를 처음 올렸습니다.
始祖의 아버님이신가 할아버님이신가? 考證이 確實치않은 태사공의 先山이 公州市 新官洞
옛말로 장깃제나루건너 宗山에 墓碑가 “全義李太師先山”인 墓所에 음10월1일(전의추향前날)
秋享祭를 올리고있으며 齊室 永慕齊境內에 태사공선대의 德行을기려 唐僧朱昊(중국스님)께서 “금강물이 마르지않는한 자손이 번성한다”는 명당묘터를 정하여주신 禪師를 모시는 古朴한 石佛 한位를 모신 祠堂이 전해나려오고 있습니다.
7세조(仟)께서는 高麗高宗年代(1256년)에 水軍을이끌고 蒙古兵을 무찌른 史實이 高麗史記錄이있어 지금도 海軍軍艦에 李仟艦이 있으며, 8世 3兄弟分중 仲派 文莊公(諱:混)께서는 高麗
高宗年代(1252년)에 나시어 忠宣王代(1312년.壽:61세)까지 壁上三韓僉議政丞으로 致仕하여
禮安伯으로 封했고 文莊公이라 諡號받으심이 高麗史節要(546페이지)에 記錄이 있고
9世(諱:彦昇) 10世(諱:翊) 11世(諱:昪) 12世(諱:竦) 4代와
13世 兄弟分(諱:蕆.翼襄公. 諱:韞.吏判公) 까지 5대 6位分의 壇所를 서울 노원구 월계동
恪心祠에 모시고 매년 음3월7일과 9월27일에 吏判公派 主導로 春秋香火를 올리고 있는바
元來 恪心祠地域(옛 楊州.道峯山下)은 禮安李氏(吏判公派)의 先瑩域으로 吏判公派의 累代의
山所가 뫼셔져있고 傍16세조(吏判公曾孫) 左議政公(諱:蓂.諡號:貞簡公)의 오랜 神道碑가 서울市指定 文化財로 保護되고있어서 서울 都心속에서도 先山墳墓와 이번에 세로이 重修된 恪心齊
(追遠祠.崇德堂.恪心齊.貞簡公神道碑閣.內外三門)는 우리 禮安李氏의 象徵이고 자랑입니다.
13世祖(憲字20代祖)翼襄公께서는 李朝 世宗祖代(1376년~1451년.壽76)의 名臣으로 그功蹟이 지금에도 빛나 陸軍士官學校에 翼襄公의 功蹟을 기리고 이어받자는 뜻에서 科學館을
“翼襄館”이라 命名하였고, 1993년4월을 “李蕆의달”로 政府가 記念하고追仰한 어른으로,이어른의
玄孫이신 17世(諱:沆)從仕郞公께서 李祖中宗年代(서기1510년頃)에 落南하시어 뿌리내린 報恩에 13世부터 16世까지 4대를 設壇하여 모시던중, 1945년 解放直後에 報恩 암소바위에
翼襄公의 神道碑와 碑閣(追遠閣.諭書閣)을 創建하고 壇所도 따로모셔 음3월9일(完定日)에 春享을 모셔 나려오고 있습니다.
쇠실壇所3代(14世~16世)의 壇祀와 落南하신 17世 從仕郞公부터 20世(諱:晶.憲字13代祖)까지4대의 墓祀를 매년 음10월2일 全義 秋享後 첫日曜日에 올리면서 이하 나뉘어진 각小門中의 享祀도 아울러모심으로서 이날은“崇祖의날”이자,흐터져있는子孫의 “맞남의날”로 定着되었습니다.
96年7월 33世.(翼襄公20代孫) 憲 榮 謹稿
도 난 신 고 서 (분묘 구비 석물)
보은군 외속리면 구인리 산15.16.17.및 27번지일대 임야 약45정보는 외속리면 구인리에 약 500년전부터 세거하는 예안이씨 익양공파의 종산으로서 산지일대에 당시족 누대선조의 분묘가 산재한중
산15번지에 소재한
예안이씨 익양공 휘 이 천(이조 세종조의 명신으로 오창리427번지에 실기비각 소재(1376-1451)신고자의 20대조)의 현손 휘 이 항(1465-1513.종사랑공.신고자의 16대조)의 묘소와, 산 27에 소재한
익양공의 5대손 휘 이 경 종(1498-1561.혜민서 의학교수공.신고자의15대조)과 익양공의 6대손 휘 이 언(1528-1593.성균진사공.신고자의14대조)의 분묘는 보은에 낙향하신 중시조의 묘소로 특히 산27번지(속칭쇠실 주봉)에 소재한 교수공과 진사공의 분묘 상하분은 가진석물을 완비한 거대분묘인바 진사공의 손 4형제분이 입석하였다는 선대로부터의 전설로 보아 1600년대의 시설물로서 최소350년이 경과함으로서 당시의 묘비는 이미 마멸되어 식별이 불가하여 약 20년전에 재입석하고, 묘소 양측에 시립한 문관석(상하분 4기)은 오랜 선대의 유품으로 길이 보존 되어오던중
1999년 2월25일 동리거주 자손 이 정 직(1949년생)이 인근 전답을 답품중 위 문관석 4기가 도난되었슴을 확인하고 도난신고합니다.
1999년 2 월 일
신고인: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하나로(아)103/804호 이 헌 영 (042)486-0850
盜 難 申 告 書 (墳墓 具備 石物)
報恩郡 外俗離面 求仁里 山15.16.17및27번지 一帶 林野 약45정보는 外俗離面 求仁里에 約 500년전부터 世居하는 禮安李氏 翼襄公派의 宗山으로서 山地一帶에 當氏族 累代先祖의 墳墓가 散在한중
山15번지에 所在한
禮安李氏 翼襄公 諱 李 蕆(李朝 世宗朝의 名臣으로 梧倉里427번지에 實記碑閣 所在(西紀1376-1451)申告者의 20代祖)의 玄孫 諱 李 沆
(西紀1465-1513.從仕郞公.申告者의 16代祖)의 墓所와, 山 27에 所在한
翼襄公의 5代孫 諱 李 擎 宗(1498-1561.惠民署 醫學敎授公.申告者의15代祖)과 翼襄公의 6代孫 諱 李 彦(1528-1593.成均進士公.申告者의14代祖)의 墳墓는 報恩에 落鄕하신 中始祖의 墓所로 특히 산27번지(俗稱쇠실 住峰)에 所在한 敎授公과 進士公의 墳墓 上下墳은
가진石物을 完備한 巨大墳墓인바 進士公의 孫 4兄弟分이 立石하였 다는 先代로부터의 傳說로 보아 1600년대의 施設物로서 最少350년 이 經過함으로서 當時의 墓碑는 이미 磨滅되어 識別이 不可하여 약 20년전에 再立石하고, 墓所 兩側에 侍立한 文官石(上下墳 4基)은 오랜 先代의 遺品으로 길이 保存 되어오던중
1999년 2월25일 洞里居住 子孫 李 貞 稙(1949년생)이 隣近 田畓을 답품중 위 文官石 4基가 盜難되었슴을 確認하고 盜難申告합니다.
1999년 2 월 일
신고인: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하나로(아)103/804호 李 憲 榮
(310703-1400914) (042)486-0850
恪 心 祠 賦
여기 恪心洞天에
禮安李姓 子孫들이 모였습니다.
得姓以來 先祖의 얼이 서리고
崇祖의 精誠으로 가뀌어진 遺跡地에
先祖를 追慕하는 春秋享祀가
各處의 子孫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여러 일가어르신네 반갑습니다
그동안 宅內 平安 하셨습니까?
行列이 높고낮건 老少間에 칭화없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情談을 나눌때에
한血族 한一家의 血緣과 紐帶感에
저절로 親近感이 솟아납니다.
오랜만에 만난자리 夜深한줄 모르고
先代의 偉勳談 귀담아 새겨듣고
讚嘆과 畏敬心이 저절로 솟아날제
우리도 본받고 子孫訓導 힘써서
萬代에 기리기리 이어지도록
새롭게 다짐하고 實行합시다.
大田 憲 榮(33世)의 所懷입니다.
族 譜 來 歷
1. 숙종을묘보 (1675년간.약320년전)20세고산선생휘유장창간
(단권)
2.영조갑신보(1764년간.약230년전)23세하지옹상진서문 (삼권) (만촌파 별보)
3. 순조임오보 (1822년간.약170년전)25세 현감의현서문
(오권) (만촌파별보)
4. 고종무술보 (1898년간.약100년전)27세휘병흠선조서문
(팔권) (만촌파별보)
*대정14년(1925년) 종통시비재판
(원고 경북안동록전 이호풍.피고 경북영덕백곡 이남선)
5. 정묘대동보 (1927년 삼파합보간)학로 정렬 진호씨서문
(일권만 출간하고 중단)(별보없음)
6. 무술대동보 (1958년간) 삼파각서문 문장공파 회춘서
(한지 20권) (별보없고 가평파 온양문중입보)
7. 익양공파보 (임인.1962년간) 고선 경선주관 용건서)
(한지 단권)
만촌파를 부정공자손으로 입보, 계통정립하고 15여년간 화평유지.
1978년경 기미대동보 수단에 즈음하여 만촌파주관으로 익양공파보 상계를 임의로 가제(가평파를 종통으로영입)하여 기미보원고 모록제출 하였으나 이의제기로 가평파 별보입보됨.
8. 기미대동보 (1979년간) 삼파각서문 문장공파 상선서
(승안군파합사파족보 총21권청표지양장. 가평파-별보. 만촌파-부정공자손으로)
9. 경오대동보 (1990년간) 중조사형제분왜곡수록 오류시정
(만촌파 불능저대 자진탈보(범례14항). 세적편합 구권 흑표지양장)
族 譜 來 歷
1. 肅宗乙卯譜 (1675년刊.약320년전)20世孤山先生諱惟樟創刊
(單卷) *序文만 남김
2.英祖甲申譜(1764년간.약230년전)23世下枝翁象辰序文 (三卷) (晩村派 別譜)(眞本 準哲 所藏)
3. 純祖壬午譜 (1822년간.약170년전)25世 縣監宜鉉序文
(五券) (晩村派別譜) (眞本 準哲 所藏)
4. 高宗戊戌譜 (1898년간.약100년전)27世諱秉欽序文
(八卷) (晩村派別譜) (眞本 準哲 所藏)
*大正14年(1925년) 宗統是非裁判
(원고 경북안동록전 이호풍.피고 경북영덕백곡 이남선)
5. 丁卯大同譜 (1927년 三派合譜刊)學魯 貞烈 軫鎬氏序文
(一卷만 出刊하고 中斷)(別譜없음)
6. 戊戌大同譜 (1958年刊) 三派各序文 文莊公派 會春序
(韓紙 20권) (別譜없고 加平派 溫陽門中入譜)
7. 翼襄公派譜 (壬寅.1962年刊) 固善 璟善主管 用建序)
(韓紙 單卷)
晩村派 提議로 晩村派를 副正公子孫으로 入譜, 系統定立하고 15여년간
和平維持.
1978년경 己未大同譜 收單에 즈음하여 晩村派(固善)主管으로 翼襄公派譜 上系를 任意로 加除(加平派를 宗統으로迎入)하여 己未譜原稿를 冒錄提出 하였으나 異議提起로 加平派는 別譜入譜됨.
8. 己未大同譜 (1979年刊) 三派各序文 文莊公派 尙善序
(承安君派合四派族譜 總21卷靑表紙洋裝. 加平派-別譜. 晩村派-副正公子孫으로)
9. 庚午大同譜 (1990年刊) 中祖四兄弟分歪曲收錄 誤謬是正
(晩村派 不能著代 自進脫譜(범례14항).
(加平派 牙山派祖(秀培)孫(18世)으로 系統定立).
(世蹟萹合 九卷 黑表紙洋裝)
崇 思 齊 賦
여기 암소바위 崇思齊에
翼襄公 後孫들이 모였습니다.
落鄕以來 先祖의 얼이 서리고
崇祖의 精誠으로 가꾸어진 遺跡地에
先祖를 追慕하는 秋享祭禮가
各處의 子孫들을 뫼게 하였습니다.
여러 일가어르신네 반갑습니다
그동안 宅內 平安 하셨습니까?
行列이 높고낮건 老少間에 칭화없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情談을 나눌때에
한血族 한一家의 血緣과 紐帶感에
저절로 親近感이 솟아납니다.
오랜만에 만난자리 談笑도 즐거웁고
先代의 偉勳談 귀담아 새겨듣고
讚嘆과 畏敬心이 저절로 솟아날제
우리도 본받고 子孫訓導 힘써서
萬代에 기리기리 이어지도록
새롭게 다짐하고 實行합시다.
大田 憲 榮의 所懷입니다.
崇 慕 錄
太師公 先山 永 慕 齊(公州 新官洞 先山) 음10월1일 (고려태조: 서기 918년 개국)
始 祖(太師公) 諱: 棹 (配位:陜川洪氏) 永 思 齊(全義 柳川 始祖墓) 음3월3일.10월2일
2世~ 8世 2世: 康 (精勇衛大將軍) 永 思 齊(全義 祠堂. 景遠祠)
3世:秀英(兵部尙書) “”
4世:文景(千牛衛大將軍) “”
5世:允寬(刑部侍郞) “”
6世: 順 (保勝別將) “”
7世: 仟 (東巖叟公) “” (고려고종43년(1256년)麗蒙戰때 장수)
8世:子蒝(大司成公) (大司成公派).......3兄弟分 3派로 分系 永思齊
混 (文 莊 公) ( 文莊公派) (서기1252-1312 壽 61) “”
子華(典 書 公) ( 典書公派) “”
(文莊公派)9世~
9世:彦昇(大將軍公) 恪心祠 壇所(서울 月溪洞) 음3월7일.9월27일
~12世.
10世:시조(1세) 翊 (提學公) (配位:彦陽金氏) “”
11世: 昪 (成均祭酒公) (配位:文化柳氏) “”
12世: 竦 (軍簿判書公) (配位:光山金氏.曲城廉氏)“”(1388.禑王14년 卒)
13世:翼襄公 (蕆)(配:陽城李氏)(恪心祠 壇所에兄弟分合祀)(報恩에 追遠閣 諭書閣과 設壇)(1376-1451 壽 76)
吏判公 (韞)(配:安東權氏.草溪鄭氏)..........(吏判公派)
(翼襄公派)
14世:府使公(孝老)(配:原州元氏) 報恩.쇠실壇所(3代設壇) 음10월2일後첫일요일
(吏判公派 14世 左贊成公 愼. 上護軍公 恃 )
15世:原州判官公(仲石)(配:鎭川宋氏) “”
(吏判公派:15世 孝幹 義幹(金浦).輔幹16世:蓂 (1496-1572)(全義).弼幹(16世 英. 筌. 薰 3兄弟分 分系)碩幹.
16世:副司猛公(秀垠)(配:全池李氏).........................(報恩派) “”
護軍公 (秀培)(配:順興安氏)..........................(牙山派) 와 (加平派)
生員公 (秀墩)(配:慶州金氏)........................(靑山派) 墓:報恩쇠실卯坐
-----------------------------------------------------
17世:從仕郞公 (沆) (配:晋州柳氏,墓在楊州) 從仕郞公墓: 쇠실 陰地便.有碣
(종사랑공:1465-1513 수 49세. 교수공:1498-1561 수 63 . 부자분 약500년전 落南하심)
18世:敎授公 (擎宗) (配:瑞山鄭氏) 墓: 住峰 連墳 雙墳.有碣
19世:進士公 ( 彦 )(配位:安東金氏.東萊鄭氏.咸昌金氏.密陽朴氏四配)墓:住峰 連墳.有碣
20世:生員公 ( 晶 )(配位:上洛金氏) 墓:암소바위外先祖墓下.合墳.有碣. 將仕郞公(曜)派分系
-----------------------------------------------------------------------
21世(憲字12代祖) 命 弘(墓:陽地便
命 徵(墓:陰地便)...............(22世:成晩. 殷晩. 重晩)
命 新(墓:암소바위)...........(22世:渭晩. 亨晩)
命 益(墓:從仕郞公墓下)...(22世:松晩. 極晩)로 分系됨
22世:守晩. 慶晩)(1607-1669.330년전)
23世:養拙堂.
24世:相宗.(1715-1769.230년전)
25世:翼文.(1748-1791.210년전)翼武.
26世:希榮.
27世(憲자6代祖)輔仁(1803-1839.160년전) 浩仁兄弟분. 28世:(五代祖 廷卨 墓:쇠실 줄산소)
29世(憲자高祖考)根澈(墓:양지편여흥민씨묘하합폄)(1846-1895.105년전)
用健(墓:제실좌록광주안씨묘 좌하. 배위: 평산신씨. 교하노씨)
根微(墓:대궐터.배위 순흥안씨합폄)(30세:명선. 정선)
30世(曾祖考)南善 墓:쇠실줄산소. 배묘:평산신씨합폄. (在善 大善 3兄弟분)
31世(할아버지) 準 永(墓:제실 뒤. 배묘:쇠실줄산소최하단)(1889-1939.60년전)
準 久(墓:제실오른쪽하단. 배묘:전북 익산)
先 祖 來 歷 (正本)
8世混 (文 莊 公) ( 文莊公派)(서기1252-1312 壽 61)
諱 子蒝(大司成公) 子華(典書公)
9世:彦昇(大將軍公) 恪心祠 壇所(서울 月溪洞) 음3월7일.9월27일
10世:始祖(1世) 翊 (提學公) (配位:彦陽金氏) “移籍禮安”
11世: 昪 (成均祭酒公) (配位:文化柳氏)
12世: 竦 (軍簿判書公) (配位:光山金氏.曲城廉氏) (1388.禑王14년 卒)
13世(4世.20代祖)翼襄公蕆.禑王 丙辰(1376)生 文宗辛未(1451)卒壽:76
(配 陽城李氏) 慶尙 忠淸兵馬節度使. 工曺參判. 兵.戶曺判書. 輔國崇祿大夫. 銅鑄 活字.
簡儀.圭表.鐘磬(경) 自擊漏. 觀測器. 天球儀. 日時計. 測候 測雨器. 仰釜日晷(귀). 倭寇退治.
六鎭開拓등 功績許多.
14世(19대조):府使公(孝老)(配:原州元氏) 報恩.쇠실壇所(3代設壇) 음10월2일後첫일요일
(吏判公派 14世 左贊成公 愼. 上護軍公 恃 )
15世(18대조):原州判官公(仲石)(配:鎭川宋氏) (吏判公派:15世 孝幹 義幹(金浦).輔幹16世:蓂 (1496-1572)(全義).弼幹(16世 英. 筌. 薰 3兄弟分 分系)碩幹.
16世(17대조):副司猛公 秀垠(配:全池李氏)..(報恩) 秀培(牙山). 秀墩(靑山)
17世(16대)從仕郞公 沆.世祖乙酉(1465)生 中宗癸酉(1513)卒. 壽49 配:晋州柳氏.
약500년전 末年에落南하심.
18世(15대조)敎授公擎宗. 燕山戊午(1498)生 明宗辛酉(1561)卒 壽 63
配:瑞山鄭氏.己卯士禍時(1519)21歲.
19世(14대조)菊齊進士公彦.中宗戊子(1528)生 宣祖癸巳(1593)卒 壽66
配:安東金氏.后配:東萊鄭氏.三配:咸昌金氏.四配:密陽朴氏.
父 敎授公30歲時에 報恩에서 出生하심.
20世(13대조)生員公晶.宣祖丙戌(1586)生 仁祖癸未(1643)卒 壽 57.
配:上洛金氏 丙子胡亂 三學士救恤史錄(薄雲眞帖)
21世(12대조)進士公命弘.宣祖丁未(1607)生 顯宗己酉(1669)卒 壽 62.
配:南原梁氏 仁祖癸酉(1633)進士.(忌:5월24일. 3월초1일 入)
22世(11대조)守晩 仁祖辛未(1631)生 肅宗庚辰(1700)卒 壽 70.
配:陜川李氏.(忌:11월22일. 12월2일 入)
23世(10대조)養拙堂 莢 肅宗乙卯(1675)生 英祖壬戌(1742)卒 壽 67.
配:全州崔氏. (生父 慶晩) (忌: 5월10일. 5월11일 入)
24世(9대조)相宗 肅宗乙未(1715)生 英祖己丑(1769)卒 壽 55.
配:密陽朴氏 永山金氏. (生父 菓)(忌:11월11. 9월6일. 9월4일 入)
25世(8대조)翼文 英祖戊辰(1748)生 正祖辛亥(1791)卒 壽 44.
配: 寶城吳氏. (忌: 2월20일. 9월21일.入)
25世(8대조)翼武 英祖癸未(1763)生 正祖庚子(1780)卒 壽 18.
配: 延安李氏.
26世(7대조)希榮 英祖辛丑(1781)生 憲宗甲辰(1844)卒 壽 64.
配: 廣州安氏. (生父 翼武) (忌: 5월19일. 1월18일.入)
27世(6대조)輔仁 純祖癸未(1803)生 憲宗己亥(1839)卒 壽 37.
配: 驪興閔氏 光山金氏.(忌:6월22일.10월16일.11월3일.入)
28世(5대조)廷卨 純祖甲申(1824)生 光武己亥(1899)卒 壽 76.
配:商山金氏. (忌: 8월작은그믐.3월16일.入)
29世(高祖考)根徹 憲宗丙午(1846)生 高宗乙未(1895)卒 壽 50.
配:昌寧成氏 原州元氏.(忌:9월그믐. 섯달작은그믐. 11월24入祭)
30世(曾祖考)南善 高宗己巳(1869)生 昭和己巳(1929)卒 壽 61.
配: 平山申氏. (盈德서 別世) (忌:11월그믐. 6월4일 入祭.)
31世(祖考)準永 高宗己丑(1889)生 昭和己卯(1939)卒 壽 51.
祖母:全州李氏(1887-1966 壽 80)(忌:5월28.10월9일 入祭)
32世(考)宗植 隆熙壬子(1912)生 建國庚寅(1950)卒 壽 39.
妣:綾城具氏 (1910-1983卒 壽 74)(忌:5월그믐.9.28 入祭)
.................................................................................................................
西征錄 編纂序文
이 “서정록(西征錄)”은 翼襄顯祖께서
朝鮮 世宗朝代에 빛나는 功績中 鴨綠江과
豆滿江을 넘어 女眞族에 대한 遠征討伐과
六鎭開拓으로서 貢獻하신 部分의 詳細實錄
인바, 著者에 對해서는 異說이 있어 이름은
적을 수 없고 奎章閣에 所藏된 木版原本을
國防部가 戰爭史를 硏究하는 課程에서
戰史編纂委員會에서 飜譯한 軍史文獻集
제9권으로 硏究目的 刊行本이므로 眞本을
求得할 수 없으므로 複寫本으로 保存 및
輪讀 코저합니다.
2002년3월 .
禮安李氏 大宗會
.............................................................................................................................................
世宗諭書(追遠閣揭示懸板 原文)
(世宗19년(1437)9월戊子朔29일丙辰)
諭 平安道節制使李蕆曰 癸丑婆猪之役 崔閏德等保全沈吒納奴所居 溫言以待 不害一人 不犯一物 是足爲感矣 而猶不感焉 婦人之被獲者 大臣皆謂宜頒士卒 予乃矜燐 令男婦不混處 館穀如待賓客 待之以禮 終乃並還本土 亦足爲感矣 而猶不感焉 其滿住所遣人 予不計驛路殘弊 許令上送 優給衣食
所言皆聽 又告饑于我 請賜米糧 予乃矜恤 連賜米粟 有人心者 所宜感悅 而猶不感悅 連歲犯邊 殺虜無辜之民 肆惡倍於前昔 予於是乃知野人之種 禽獸之性 難以德化之也 雖善待之 而爲惡之心一也 不善待之 而爲惡之心亦一也 故今秋
不得己有討賊之擧 雖不穫(獲)渠魁 其黨類之被執者多矣 加以牛馬被傷 禾穀盡燒 亦可懲艾矣 然被禽獸無耻者 焉能悔過自新 以慕德向化乎 必使人稱爲行人 或請粮或觀變矣
其管下人到邊邑 雖請上京 當答曰 汝輩前者連次上京 雖厚蒙上恩 不改前心 誘引忽刺溫 殺害邊民如舊 今滿住親來歸順 或遣親子 待衛京師 則我當厚(待)上送矣 汝之引誘忽刺溫
非我料度也 言之者多矣 略給所請行粮鹽斗 仍使譯者饋餉還送 亦可矣.
.......................................................................................................................................
세종유서 (추원각 현판 원문)
임금은 평안도 병마도절제사 이 천에게 다음과같이 사후처리에 관한 훈령을 내렸다.
계축년 파저강 토벌당시 최윤덕은 심타나노의 부락을 보전해 주고 따뜻한 말로 타이르며 단 한사람도 해치지 않고 물건 한 개 건드리지 않았다.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는 심타나노일족을 충분히 감화시킬 만한 것이었으나 그는 끝내 최윤덕의 은혜에 감동할 줄 몰랐다. 대신들이 사로잡혀 끌려온 야인부녀를 장병를에게 나누워주자고 나는 그녀들을 불상히 여겨 남녀가 섞여 거처하지 못하게 하고 집과 식량을 주어 손님 접대하듯 깍듯이 대우해 주었다.
적괴 이만주의 아들 예도호(也多好)에게조차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예의로써 대우하여 마침내는 제 땅으로 돌려보냈다.
이렇듯 포로에게까지 후대하였으니 저들을 감화시킬 만하였은나,저들은 끝끝내 우리측 호의에 감동할 줄 몰랐다.
그 후 포로와 노획물 송환을 요청하는 이만주의 교섭사절이 여러 차례 왔을 때, 조정의 여론은 모두 입국시켜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으나, 나는 우리 역로(驛路)의 번거로움을 개의치 않고 모두 받아들여 먹을것과 입을 것을 넉넉히 주고, 요청하는 대로 저들의 포로와 노획물을 남김없이 돌려주었다.
또 그로부터 이만주가 굶주림을 호소하여 쌀과 양식을 구걸할 때마다 나는 그의 처지를 불상히 여겨 요청하는대로 쌀과 좁쌀을 주어서 그들 부족의 목슴을 이어주었다.
이쯤해서 나는 그들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우리 처사에 의당 감동하고 기뻐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만주 일당은 감동하거나 기꺼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마다 우리국경에 보복침공을 거듭하여 죄없는 백성을 죽이고 잡아가고 전날보다 더욱 심하게 포악스런 짓을 자행하였으니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야인족속이란 짐승이나 다를바 없는 성품을 지녀 덕(德)으로써 감화시키기 어려움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잘 대우해 주더라도 저들의 모진 심사는 한결같으며, 각박하게 대해 주더라도 저들의 모진 심사는 역시 한결 같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올 가을에 또다시 토벌군을 이르켜 응징하지 않을 수 없으며 토벌군이 목표한바 적괴 이만주를 잡는 데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그 족당(族黨)을 다수 포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더욱이 저들의 목숨과도 같은 농우(農牛)와 마필을 거의 못쓰게 만들었고, 벼와 곡식을 남김없이 불태워 없앴으니 저들의 죄악을 응징한다는 당초 기대효과를 충분하게 거둔 셈이다.
그러나 저들은 짐승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족속인즉 어찌 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귀순해 올 리가 있겠는가. 이만주는 필경 또다시 전처럼 양식을 구걸하면서 우리측 동정을 살피러 올것이 분명하다.
경은 이만주의 교섭사절이 국경에 나타나 입국하기를 요청할 경우, 반드시 이렇게 응답하라.
1. 계축년이후 너희들은 연달아 입국 상경하여 우리 전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왔으면서도 예전의 모진 마음을 고치기는커녕 과거와 마찬가지로 호라운 우디거 부족을 끌어드려 변방백성을 살해하였다. 이제라도 이만주가 뉘우치고 몸소 와서 귀순하거나 또는 친아들을 서울에 보내어 시위(侍衛)하겠다면 내가 의당 후하게 대접하여 상경시키겠거니와 그밖의 사람을 일체 입국을 허가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홀라운 우디거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내가 짐작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확실한 제보자가 여럿 있어 밝혀진 사실이다. 이와 아울러 저들의 요청이 있을 경우 약간의 여행용 식량과 소금 몇 말을 지급하고 우리측 통역을 시켜 음식을 먹여서 돌려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1. 계축년 토벌 이후 파저강 야인 중에서부족을 버리고 귀순해 오는자가 많았으나 이만주가 송환을 요청하기에 모두 제 땅으로 돌려 보냈는데 귀순자들이 압록강을 건너서자 이만주는 이들을 즉석에서 모조리 쏘아 죽여 앙갚음을 하였다 하므로 내가 몹시 후회했었다.지금 재토벌을 받고 나서 이만주 휘하 야인들은 가축을 잃은데다 식량마저 불타 살아나갈 길이 없어졌으므로 우리측에 귀화하겠다고 오는 자가 간혹 있을 것이다.
경은 이들을 평안하게 받아들여 잘 먹이고 입혀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조처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
1. 조명간구자는 압록강 만곡부에 위치하여 누차 도적들의 습격대상이 되었는바 한때 이 촌락을 철폐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조상께서 정하신 국경을 물릴 수 없어 그대로 두어 왔다. 이제 경이 또다시 철폐를 요청하니 경의 말대로 험준한 절벽길 때문에 유사시 구원부대를 적기에 투입할 수 없다면 부득불 철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국경선을 섣불리 축소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여 지키는 것이 조상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압록강 연변에 조명간구자처럼 방어하기 어려운 요해지가 그리 많지 않은 이상 경은 그곳 성책(城柵)의 재배치 등 자체방어시설 강화에 마음과 힘을 모두 기울여 조명간 백성들이 영원히 적의 침략을 받는 근심이 없도록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라.
이날 임금은 다시 평안도 병마절제사 이 천에게 훈령을 내렸다.
“전쟁을 수행하는 자는 오직 올바른 전법만 고지식하게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기만전술과 비정상적인 방법도 겸해 쓸 줄 알아야한다. 옛날 장수중에는 죄수를 사면시키고 그 힘을 빌려 작전에 성과를 거둔 자도 있다. 한고조(漢高祖)유방(劉邦)이 영포(英布)를 토벌할 때 사형수를 사면하여 종군 시켰으며 이광리(李廣利)가 이사(貳師)를 공격할 때도 사형수의 힘을 빌려 승리한 사례도 있다.
이제 파저강 일대를 거듭 토벌한 직후라 적의 동정을 파악해 두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그러므로 적지 정찰을 재개하되 우리도 사형수를 정탐병으로 이용해 보면 어떨까 한다. 십악 대죄(十惡大罪)를 범한 자는 사면할 수 없으나 평안도 안의 일반 사형수중에서 적지의 지형과 도로 형편을 익히 알고 또 체력과 용기 지혜를 갖춘 죄수 2,3명을 선발하여 강건너 적지에 침투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죄값 대신에 목숨을 걸고 이만주의 소굴을 찾아내게 한다면 성공할 승산도 있을 듯하다. 이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여 아뢰라.
이 천은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수허성(愁許城)은 비록 연변에 있으나 지금까지 첩자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입니다. 현재는 눈이 쌓이고 낙엽이 떨어져서 정탐자가 은신할 곳도 없고 움직이는 대로 흔적이 드러납니다. 내년 여름 초목이 무성한 녹음기를 기다려 신중한 자를 뽑아 잠입시키는 것이 옳겠습니다.
(10월20일(양`11.20)). 평안도 병마도절제사 이 천이 토벌당시 포획한 남녀 포로와 귀화야인 퉁산(童山)등 3명을 바쳤다.
(11월1일(양12.7)) 임금은 사정전에 나아가 평안도 도절제사 이 천과 그를 따라 종군 하였던 군관들에게 위로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룹명 > 宗中事 記錄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에 禮安祠 건립을 듣고 (0) | 2016.03.13 |
---|---|
명문장.1 ( 실록발췌집 서문.참 잘썼다고 생각하는 글) (0) | 2016.02.20 |
全義 秋享 奉奠後 臨時總會 (2001.11.16) 提言事項 (0) | 2016.02.20 |
文莊公寄姪文義公詩 (0) | 2016.02.20 |
翼襄公 李 蕆 實錄(朝鮮王朝實錄原本) (0) | 2016.0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