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북방개척과 익양공 이 천의 '서정록'(3)
종보(宗報) "불휘와 생명" 창간호부터 매호마다 빠짐없이 익양 선조의 위업을 현창(顯彰)하며 기려왔으니
익양공 이 천(翼襄公 李 蕆)선조(고려 우왕2년1376ㅡ이조 문종 원년1451년. 수 76세)께서는 이조 세종년대의 으뜸 명신으로 세종실록에 수록된 사적을 토대로 공의 찬연한 업적이 오늘날까지도 찬양되고 후학들의 연구대상이기도한데 세종년대의 수 많은 과학 발명 창작물 진품이 보존되어있고
무신으로 대마도 토왜와 충청도병마도절제사로서 왜적정벌중 병선개량하신 사적(事蹟)이며 세종조에서 평안도병마도절제사로 서북 야인을 정벌하셔서 국기(國基)를 다진 기록등이 왕조실록에 상세히 수록되어있어 후세 사학자와 군사전문가들의 연구교재이고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고
국가가 과학기술인을 숭상하고 선양하기 위하여 항구적으로 보존 전시하는"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국가적 거목 과학기술인과 함께 "세종시대 천문 인쇄 군사분야에서 활약한 기계기술자 이 천"으로 모셔저있고
장군 과학자 이 천을 기리기 위하여 "익양공 이 천의 달"(1993년 4월)에 거국적 선양사업과 학술세미나의 개최와
정군육성의 요람 육군사관학교에 과학관을 "익양관"으로 명명하고 사관생도들로 하여금 장군 과학자를 숭앙케하는등
또 수 많은 연구물이 책자로 발간되어있고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어서 위대하신 역사인물로 숭앙되고 있는데
이렇게 찬양된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뿌리는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실록과 서정록(西征錄)이 입니다.
그런데 위대하신 역사인물은 전기(傳記) 문집(文集) 유물과 여러형태의 문헌들이 후세에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수 없는 병난과 사화를 거치면서 흔적조차 없는 어른들도 또한 많은중에 익양선조의 사적도 남겨진게 없으니
익양 선조의 유적을 상고할려면 왕조실록과 서정록뿐이고 이를 기초로한 백곡실기와 연구론문총서가 전부입니다
그런중에도 1516년 중종11년 익양공의 외현손이신 이 순(李 純)께서 함경도관찰사 휘하에서 창제하신 500년래의 서정록 원 정본(原 正本)이 국보 보물과 세계기록유산을 보존 관리하는 규장각에 수장 보존되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고 항구적 보존을 위하여 특별 수장되어있는중에도 연구 열람을 위한 부본을 항시 열람할 수 있어서
차후에 복사본을 다수 만들어서 연구자와 후손들이 보존하고 열람할 수도 있겠는데
흔히 그 자손들이나 역사학자들이 위인의 행적을 과장하거나 사실과 동떨어지게 왜곡하는 우를 범할수 있지만
이 천 선조만은 왕조실록과 서정록중의 역사 사실을 가감없이 번역 해설한 책자와 연구론총만이 전파되고 있는중에
자라는 세대를 위한 교재로서는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서술체의 해설서가 많이 출판되고 있어서 역사를 배우고 역사중인물을 익히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여러 과학 연구소의 과학 연구지에는
이 천 선조에 관한 연구논문이 참으로 많은중에 그 일부를 여기에 전재합니다.
(표준과학 연구지의 익양공 이 천 삽화입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발행 2012.1-2월호 46-48쪽)
제목: 세종대왕의 대업을 도운 숨은 공신, 이 천
과학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업적
이천은 공학자의 실력을 발휘, 무예를 익히면서도 각종 전투장비의 윈리연구에 몰두하였다. 세종대왕은 금속주조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를 공조참판에 임명하여 신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제조를 총괄토록 하였다
이천은 경자자의 주조로 인해 인쇄를 할 때 빠른 시간에 많은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좀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체(字體)가
필요하다 여겨 이를 개발하기위해 힘썼다. 그리하여 1434년, 갑인자(甲寅字)가 탄생했다. 20여만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자체가 미려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상황에 따라 혼합해 조판이 가능한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갑인자 기술 덕분에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이 완성된 것이다.
이천은 이외에도 오늘날의 기상청 역할을 했던 서운관(書雲觀)에서 장영실(蔣英實)등과 함께 수년간 노력 끝에
1437년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등의 천문관측기구와 가마솥같이 오목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咎).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咎)와 천평일구(天平日咎), 정남일구(定南日咎), 천체관측기구인 규표(圭表)등을 개발했다.
또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 불리는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 제작은 물론 천문대인 간의대(簡儀臺)도 설치하였다
1442년 이천과 장영실이 만든 우량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는 이탈리아 B 가스텔리가 만든 측우그(1639)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외에도 이천은 무과출신답게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우리나라 변방에 출현하던 만주족들의 침입을 막고 그들이 사용하는 쇠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무엇보다 이천의 주된 업적은 도량형 표준화, 천문관측기기의 개발,금속활자의 개량, 군사기술의 대대적 혁신등을 총괄 지휘한
역량을 꼽을 수 있다. 도량형, 즉 무게, 길이, 부피 단위가 그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표준저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등
조선 과학기술의 탄탄한 기초가 이천에 의해 마련될 수 있었다.
이천은 이외에도 많은 발명품을 개발했다. 도성을 보수하는 일을 겸직하면서도성축조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중국에서 배운 기술로 사륜차를 개발했고, 근정전의 화재에 대비해 갈고리를 장치했다. 또 노궁이라는 악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굴곡을 딛고 스스로 일어선 대인
이천은 어릴 적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굴곡이 깊은 생애를 살았다.
이천은 어렸을 때 가족들이 참수를 당하고 형제만 간간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군부판서인 이송이었다.
그의 집안은 문인출신으로 할아버지 이승( ?의 착오)은 종3품인 성균관제주(祭酒)를 지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고려 말 권세가였던 염흥방의 누이여서 염흥방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관된 모든 친척이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친척 중 살아 남은 일부는 관노가 되었고 당시 어린 친척들은 임진강에 버려졌으나 이천형제는 다행히 한 승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이하 략)
이천은 1440년, 수비를 담당하던 북방 여진족이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자 국경수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천안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이후 중추원사가 되어 화포와 무기등을 개량하는데힘썼다. 그는 1445년 세종대왕이 보는 가운데 한강에서 함포 사격 수군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1450년에는 중추원의 정2품 벼슬인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조선을 위해 많은 업적을 쌓고 그 공헌으로 인해 임금의 신망이 두터웠던 이천은 세종이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선 인쇄술을 고려시대에 이미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기술의 진척이 없다가
이천으로 인해 뛰어난 인쇄기술의 완성을 보았다는것이다.
이천은 조선시대 초기 무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고 말년까지도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말년에 곤장까지 맞고 파직을 당한 장영실과 비교되곤 한다. 훗날 이천은 매우 선구적인 과학자이며 이론가로
역사 속에 기록되었다.
국방과학기술에 헌신한 그의 열정은 물론, 이론과 실제 기술을 접목하려던 그의 실천적 노력 또한 존경할 만하다.
이천은 세종대왕대에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에 매우 큰 공을 세운 한 사람으로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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