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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宗中事 記錄物

표준과학연구지 이천기사

by 우 송(又松) 2013. 1. 22.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발행 2012.1-2월호 46-48쪽)

제목: 세종대왕의 대업을 도운 숨은 공신, 이 천

과학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업적

이천은 공학자의 실력을 발휘, 무예를 익히면서도 각종 전투장비의 윈리연구에 몰두하였다. 세종대왕은 금속주조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를 공조참판에 임명하여 신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제조를 총괄토록 하였다

이천은 경자자의 주조로 인해 인쇄를 할 때 빠른 시간에 많은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좀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체(字體)가

필요하다 여겨 이를 개발하기위해 힘썼다. 그리하여 1434년, 갑인자(甲寅字)가 탄생했다. 20여만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자체가 미려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상황에 따라 혼합해 조판이 가능한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갑인자 기술 덕분에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이 완성된 것이다.

이천은 이외에도 오늘날의 기상청 역할을 했던 서운관(書雲觀)에서 장영실(蔣英實)등과 함께 수년간 노력 끝에

1437년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등의 천문관측기구와 가마솥같이 오목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咎).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咎)와 천평일구(天平日咎), 정남일구(定南日咎), 천체관측기구인 규표(圭表)등을 개발했다.

또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 불리는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 제작은 물론 천문대인 간의대(簡儀臺)도 설치하였다     

1442년 이천과 장영실이 만든 우량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는 이탈리아 B 가스텔리가 만든 측우그(1639)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외에도 이천은 무과출신답게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우리나라 변방에 출현하던 만주족들의 침입을 막고 그들이 사용하는 쇠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무엇보다 이천의 주된 업적은 도량형 표준화, 천문관측기기의 개발,금속활자의 개량, 군사기술의 대대적 혁신등을 총괄 지휘한

역량을 꼽을 수 있다. 도량형, 즉 무게, 길이, 부피 단위가 그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표준저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등

조선 과학기술의 탄탄한 기초가 이천에 의해 마련될 수 있었다.

이천은 이외에도 많은 발명품을 개발했다. 도성을 보수하는 일을 겸직하면서도성축조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중국에서 배운 기술로 사륜차를 개발했고, 근정전의 화재에 대비해 갈고리를 장치했다. 또 노궁이라는 악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굴곡을 딛고 스스로 일어선 대인

 이천은 어릴 적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굴곡이 깊은 생애를 살았다.

이천은 어렸을 때 가족들이 참수를 당하고 형제만 간간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군부판서인 이송이었다.

그의 집안은 문인출신으로 할아버지 이승( 의 착오)은 종3품인 성균관제주(祭酒)를 지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고려 말 권세가였던 염흥방의 누이여서 염흥방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관된 모든 친척이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친척 중 살아 남은 일부는 관노가 되었고 당시 어린 친척들은 임진강에 버려졌으나 이천형제는 다행히 한 승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이하 략)

이천은 1440년, 수비를 담당하던 북방 여진족이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자 국경수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천안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이후 중추원사가 되어 화포와 무기등을 개량하는데힘썼다. 그는 1445년 세종대왕이 보는 가운데 한강에서 함포 사격 수군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1450년에는 중추원의 정2품 벼슬인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조선을 위해 많은 업적을 쌓고 그 공헌으로 인해 임금의 신망이 두터웠던 이천은 세종이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선 인쇄술을 고려시대에 이미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기술의 진척이 없다가

이천으로 인해 뛰어난 인쇄기술의 완성을 보았다는것이다. 

이천은 조선시대 초기 무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고 말년까지도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말년에 곤장까지 맞고 파직을 당한 장영실과 비교되곤 한다. 훗날 이천은 매우 선구적인 과학자이며 이론가로

역사 속에 기록되었다.

국방과학기술에 헌신한 그의 열정은 물론, 이론과 실제 기술을 접목하려던 그의 실천적 노력 또한 존경할 만하다. 

이천은 세종대왕대에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에 매우 큰 공을 세운 한 사람으로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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