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우송의 최초의 사진과 최근사진의 복사입니다.
올해 집나이 아흔셋의 우송은 좀 달라진게 가족간의 대화에서 말이 많아졌다고 여깁니다
특히 잽싸게 은퇴한 둘째아들의 전화때의 내 응답이 저절로 길어져서 고 통스럴 것으로 생각하지만
특히 선대의 래력이며 종사문제로 화제가 연결되면 떠듬떠듬 한참 이야기가 엉뚱하게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듣고 있는 아들쪽에선 답답해할 만큼 중간 중간에 핵심 단어를 잊어서 일러주고 싶었던 대화가 끊기지만
오늘도 문안 전화에 할아버님 장지(葬地)에선 문상객보다 일본 경찰 숫자가 더 많았다는 내 글에 대한 물음에
"독립운동하셨던 할아버지는 부정선인(不淨鮮人 후데이센징)으로 찍혀 일상 일본경찰의 계호(戒護)아래 살으셨다는,
내가 아홉살때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생존시에 요시찰인(要視察人)이셨다는 사연을 해방전 일본인 교사에게서 배웠다는,
장황한 설명을 이지음의 현대판 효행 수단인 핸펀 통화로 어찌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이 되었을까 만은 . . .
어쨋던 나는 어렸을때 많이 보아왔던 일인경찰(오나오리상? 오마와리상?)에 대하여 결코 공포심이나 혐오감이라곤
없었던 오히려 친근했던 인상이 더 짙었다고 회상됩니다
할아버지께선 겨우 겨우 익히셨던 일본말로 또 떠듬 떠듬 우리말하던 일인(순사)사이의 대화를 곁에서 지켜보며
재미있어했고 더욱이 긴 칼(軍刀) 쩔그럭 쩔그럭 위엄 과시하며 군화 바닥에선 번쩍 번쩍 돌바닥에 불 빛내던 일경을
호기심 가득 뒤따라가며 킬킬거리던 소년들에게선 그때로선 친일 반일을 모르던 철이 없던 애국소년들(?)이었습니다
1945년 3월 해방전 집나이 15세때 어렵게 어렵게 선발되어 (충북)보은 농업중학교에 입학 하자마자
당시로서는 군인정신 충만한 소년병으로 육성되며 학교공부는 뒷전으로 근로보국(勤勞報國)하며
당시 최 급선무였던 군용 항공유인 송탄유(松炭油)생산을 위한 솔뿌리캐기에 한달간씩 외지로 징발되고
연일 농장 실습중 모처럼의 장마때 교실에 입실해서 무릅 꿇고 정좌 해서 일본혼(야마도다마시 日本魂)을
몸으로 익힌 그때의 많은 소년들은 아마도 그때 익혔던 강한 정신력으로 초기 국군 간성이 되지 않았을까?싶고
전시에 평균연령 20, 3 4세 였던, 지금 생존한 6.25 참전용사들의 일제하 유년시절을 되 돌아보게 하며
그때(일제하) 유년시절에 강하게 단련된 보배로운 정신력이 6.25전쟁을 이겨낸 바탕이라고 확신하며
지금 현대세대의 인성적 정신적 자질과 견주면 . . . 가슴을 칠 지경.
( 미 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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