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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松 이헌영의 blog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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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적(足跡)에 대하여

by 우 송(又松) 2015. 1. 19.

 

내게는 출생때부터의 자질구레한 행적을 써 내려온 

족적(足跡)이라는 "내문서"기록물이 있습니다 

원래 됨됨이가 그렇게 자질구레하고 자잔한 쫍쌀이라서 그랬는지

그 좁쌀 성미 솜씨가 이날 이때까지 이어오면서 아주 유용했던 면도 있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군대에서 신임장교일때에도 영어회화가 아주 불통은 아니어서 

대대보급관으로 임명되어 미 공병보급소의 자재수령을 전담하였습니다

휴전직후 복구공사의 일환으로 공병부대는 건축 토목공사만을 전담했을때에

내 소속부대 강원도 인제의 1106야공단 115대대는 홍천으로 부대이동하여서

홍천농고를 위시하여 각 면지역의 학교신축공사에 전 병력이 투입되고  

대대보급관은 원주 가평 영등포에 있는 미 공병보급소에서 자재수령을 해 날랐습니다

소요자재를 전부 미 공병보급소에서 수령함으로 손짓발짓 영어라도 대화가 필요했었습니다

그때 수송차량은 2 1/2톤 GMC로 군부대에 신차 신규보급된 차량임으로 성능도 좋았고

공병단마다 배속된 담푸추럭중대는 GMC만도 48대씩의 신차를 보유하고 있었음으로

이 차를 하루에 10대 또는 20대씩 차출받아 맨 후미차량에 보급계 사병을 태우고

내가 선두차량에서 TS-10 인가하는 무전기로 후미차량과 연락하며 자재수령을 다녔습니다

그때는 시멘트도 미 portland cement 라고 미제시멘트외에 국내산은 아주 희소했을때

원주 ESP #1(engineer suply point)에서 시멘트만을 하루에 1000대씩 수송할때입니다

하루에 GMC 대당 50포대씩 20대가 왕복한것은 무난하였지만

(원주에서 홍천으로 수송하는 사이에 중간지점 횡성에서 운전병이 몰래

민간에선 극히 소중한 시멘트를 몇포씩 팔아먹는것을 적발하기도 하였습니다. ㅎㅎㅎ)

(도중 착복을 목적으로 창고에서 수령할때 몰래 몰래 몇포씩 더 훔쳐 실는 작태도 생기든군요 ㅎㅎㅎ)

영등포의 ESP#3 에서의 목재수령은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었습니다

먼 거리에 당일왕복이 힘들었고 꼭 소요 규격에 맞는 목재만의 선택 수령이 어려웠고

일행 열대만도 장거리 운행에 한 대열로 낙오없이 인솔하는것이 참으로 어려웠었습니다

 

이때 수령자재의 통계는 필연적이고 절실하였는데 자재계 사병에게만 마껴둘 수는 없고

수첩에 낫낫치 수령상황을 기록한게 대대 자재계의 수불대장과 일치하였는데

원래 수치에 둔감한 나로서는 실제 수령왕복만큼 어려웠던 기억입니다

그때 가죽포장으로 된 장교수첩 한권이 모자랄만큼 자재수불상황을 기록한 수첩이

훨씬 후에 발견되어 참으로 보물답다고 소중히 여기다가 없어진것이 한입니다

 

주제를 벗어난 사족이 장황했습니다

아모튼 청년시절부터 이렇게 기록을 소중히 여긴 습성이

"족적"이라는것을 유지해 오고있는 연유인듯 싶습니다

A-4용지에 잔줄로 줄 칸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것이 컴퓨터를 익히고서부터입니다

출생부터 고교를 졸업할때까지의 기록은 단순하고도 무가치하지만 

대학입학 군입대때부터의 기록은 정확하면서도 유익하고 소중합니다

우리 가족 전부의 자질구레한 상세기록이 여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족들 모두는 각기 자신의 취업 입학 개업일시등을 여기에서 확인해야만 할만큼

빠짐없이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음은 "족적"의 가치를 올려주고 소중함도 인정할것입니다

가령 셋째네의 둘째(삼남의 차녀 효진)가 됙일 연수를 언제 다녀왔는가 하는 따위 자질구레한 사단은

본인인 저는 다녀온 날짜를 알랑가 몰라도 요 요 "족적"의 기록이 우리집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으니 ...  

우리가족은 막네 원진이 고2생을 빼고 열한식구가 전부 성인이니

각기 해당사항이 여기에 포함 기록되어있음으로 모두에게 복사 배부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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