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報 제2호(2011.09)에 실린 전 大宗會 常務理事 故 準圭 대부님의 遺稿 "恪心齊 保守記" 를 읽으며
서울 노원구 월계2동 恪心洞天의 恪心祠(월계2동 청백아파트단지 지역)는
우리 예안이씨 역대 선조의 얼이 서린 일족의 터전이고 뿌리입니다.
이 각심사에 나는 약관 시물두세살때부터 육군 소위의 놋쇄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고 춘추향사 참례를 위하여
출래하였습니다
향사 전날 오후에 서둘러 도착하면 안동 풍산에서 올라오신 풍체 위풍당당하시던 會植어른하시며 제반사를 간음하시면서도 자상하시던 會春할아버님과 깐깐하시던 온양 用圭대부님앞에서 내복바람에 제복으로 바꿔입었던 1953 4년때의 철없던 시절에도 좌의정 정간공 산소향사외 산소 몇위의 향사에 시간에 쫓겨 초조하면서도 어렵게 참사한 성취감에 뿌듯했던 옛날 옛날이 회상됩니다.
지금의 각심사의 화려한 殿堂과는 도저히 비교 聯想할 수 없는 산직집 초가집 안체에서 제관들이 좁게 좁게 둘러앉아서 아침밥을 먹을때 늙은 산직옹이 허리도 펴지 못한체 연신 굽신거리며 거행하던 모습도 떠 오릅니다
이즈음에 4대설단을 이룬 고유제에 참석한다는것이 돈암동 시내버스종점에서 솔밭속 황토길을 서둘러 걸었어도너무 늦은시간에 도착한죄로 용규대부님께서 안체 안방 창문으로 굽어보시며 사립문밖의 지각생을 어찌나 닥달하시던지 혼이 빠젔던게 아마도 지금까지의 투철한 시간관념의 단초가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또 이때의 기억 한토막, 멀쩡한 허리인데도 쭉 펴지못한체 굽신거리며 거행하던 산직옹의 세대교체입니다
또 이때까지는 앞산 단소까지가 밋밋한 개활지였는데 점점 비닐하우스와 허접스런 가건물이 생기고 벽돌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이곳 벽촌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기시작하는데
비록 초가집이지만 꽤 말끔한 산직집 앞마당에 고급 세단차가 주차하고있다면 구경거리이고 화젯거리였을때인데
그 덮개가 씨워진 고급세단차가 박사장(?)(산직이 박청산)의 자가용차였었고 박사장은 허리 굽혀 굽신거리던
선대의 반작용으로 체구가 뒤로 굽어저 연극무대의 놀부쯤 거들먹거리는 장면을 여러차례 보았었습니다
그래도 박사장 휘하의 졸개들이 박사장 감시하에 산소마다 제물봉송 민첩해서 향사는 순조로웠습니다.
각설하고, 유고에서 밝힌 박사장이 專斷하다시피하던 막중 종재를 대종회에서 전권 환수하신 그 偉業은
참으로 만자손이 찬탄하고 기리 기리 기려야 할 막중 종사입니다.
종중사 관장하시는 역대 당무자가 다 그러하시지만은 재래적 종사관리를 세로운 체제로 종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회덕대종회장님과 대선이사장님 준규상무이사님과 당대 임원진들은 불구사사하시고 수년간 전래적 종재관리를 공명정대하게 체게를 세웠고, 각심사의 창건과 유적의 현창, 특히 전의 예안이씨 삼파 위선사를 주도하며 공주 전의 전각(영사제)의 건립등 성씨를 크게 빛나게 하였고 참으로 극난했던일을 수 삼년 점진적으로 이루워낸 끈질긴 집념과 공적은 만자손의 숭앙을 받아야할것입니다.
이때의 이 어른들의 허다한 고통 고충을 엿보며 찬탄해 마지않았는데 더욱이 준규대부님께서는 선도 지식인들의 교우 교류의 집성체 "인터넷 박약회"의 회장 중책을 수년간 역임하시면서 개인적으로 온라인상에서 더욱 많이 흠앙하며 친숙했던 탓으로 그 어른의 조서(早逝)가 더욱 안타깝고, 유고 말미에
"자고로 종사란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었다, 흔히 종재가 없어 위선사업이 어려울 때는 부담이 돌아 올까바 서로 회피하다가 종재가 모아젔을때는 각별한 관심을 가진 위선(僞先)사업자가 도처에서 많이 나왔다.
종중이 어려울때 불고가사하고 경비를 자담하면서 위선과 돈목과 후계를 도모하여 선대전래의 종사를 당대에 훼손되지않게 유지 향상 발전시켜 다음세대에 전승한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자손의 의무로 미련스럽게 참여하는 종사라야지 형편이 나아젔을때 회자(回資)나 받고 소일하려는 타산적인 종사 즉 자손된 권리만을 네세워 참여하는것은 결코 아니된다.
문의(門議)의 결정은 적어도 백여년의 긴 안목으로 정중해야 하며 결정된 사업을 수행할때는 일치 단결해야 한다. 매사에 자신의 척도로 꼬투리만 잡고 말로서 자기과시를 하는 사람을 고인들은 불감억단(不敢臆斷)하라고 치계(致戒)했으니 종사의 불평 방해꾼으로 비춰저서 점잔은 선비의 체통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끝으로 수 십년 종사를 하던 경험으로 후계를 위헤 잊어서는 안될 지난날 선조께서 이룩한 각심제의 연원과 면면히 이어온 선인들의 투철한 보수(保守)이력 , 그리고 그 후 변혁기에 대처했던 어려웠던 일들을 수록하여 후세 종사에 비고가 되게 하고저한다"...말미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크나 큰 교훈이고 기리 기리 새겨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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