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 장안면 오창리 보은-상주간 국도변 (보은에서 3키로지점)에
이조 세종조때 세종대왕께서 장군 과학자 익양공 이천에게 내리신 諭書와
이 어른의 사적을 기록한 實記碑를 보존하기 위한 追遠閣의 전면에
보은군이 엣 자리의 하마비를 세로 단장해서 2012년 5월 18일에 세웠습니다.
下馬碑에 대하여
하마비(下馬碑)란 왕의 존영 또는 친서 등의 존귀문서가 비치된 곳에는
존경의 표시로 이 앞을 지나가는 과객은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고 지나가도록 표시한 비석을 말하며,
이곳 하마비는
세종대왕께서 북벌 육진 개척시에 평안도 도절제사 익양공 이천(李蕆)에게 내리신
수많은 전지(傳旨)중에도 특히 북방 방어 방향을 지시한 유서(諭書)(세종 19년9월29일) 의 일부가
판본으로 유서각에 보존되어 있음으로 유서각(諭書閣)앞에서의 하마를 지시한 하마비이다.
**보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입간판 글자를 선명하게 전사 게시합니다.(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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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각 (追遠閣)
추원각은 이천(李蕆)1378-1451 선생의 실기비(實記碑)와 세종의 유서(諭書)를 편각한 목각판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이다.
실기비는 통정대부전성균관대사성원임규장각직각 조병집이 짓고 숭록대부전판돈령부사 윤용구의 글씨로 전(篆)은 후손인 정렬(貞烈)이 썼다 비문에 선생몰후육임자"先生歿後六壬子"로 되어있어 1792년(정조 16)과 1852년(철종 3)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찬서(纂書)한 이들의 직함에 전(前)자를 삽입한 점과 동일한 인물들이 이천의 후손 이홍열(李洪烈)1863-1902의 묘갈비가 있어 1912년 임자 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서판은 세종이 이천이 육진(六鎭)을 개척한 뒤 내린 글을 판각한 것이다.
추원각 우측 건물은 종중 재실인 영창재 (永昌齋)로 1693년에 이천의 후손 이협이 건물을 짓고 "양졸당"(養拙堂)이라 이름 지은 학재가 있었으나 1837년 (현종 3)에 중건한 뒤 영창재라 고치고 익양공이하 4대선조의 원향을 지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뒤 1922년 중건하였다
이천선생은 조선 전기의 무신이자 과학자로 경자자 갑인자를 만드는 등
세종대의 인쇄술 발달에 크게 공헌했고 간의 혼의 앙부일구 등 천문기구의 제작을 지휘했다.
평안도절제사로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의 설치를 건의해 실현했다 경상도 예안현 현 안동시 도산면 출생으로 호는 불곡(佛谷)이고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군부판서 이송의 아들이며 조부 이변(李昪)은 종3품 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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