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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松 이헌영의 blog 입니다
그룹명/宗中事 記錄物

西 征 錄

by 우 송(又松) 2011. 9. 25.

 

 

 

 

 

 

          西    征    錄 


●서정록에 대하여

서정록은 조선조 제4대 왕 세종(세종)14년 (1432년)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국토개척사업의 일환으로 고려 멸망이후(1392) 조선 건국 초기 이래 압록강 일대와 함경북도지역을 점거한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여 두만강 유역의 육진(六鎭)과 압록강 유역의 사군(四郡)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여진족의 본거지인 파저강(婆狙江), 즉 현 중국 요녕성(遼寧城) 환인현(桓因縣) 훈강 (渾江) 일대를 1433년과 1437년 2차에 걸쳐 공격 소탕한 작전 기록입니다.


 또한 서정록은 서정록 後記(跋文)에서 밝혔다시피 1515년(중종10년)에

李 純이 함경도 관찰사 尹金孫의 막하에서 근무할 때 집에 소장해있던 책을 소매속에 넣고 가서 관찰사에게 “이 책은 서북방 야인정벌의 시말과 작전내용 육진 설치등 함경도에 관한 내용이니 인쇄하여 널리 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고 진언하니 관찰사가 기꺼이 호응하여 일을 시작한지 3개월만에 완성한것이 지금까지 보존된 木板本 西征錄인데


이 순이 집에 소장한 책 서정록의 원류는 세종께서 세상을 떠난지 2년후 1452년(문종2년)에 의정부 좌의정 정인지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와 사관

(史官) 58명이 편찬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사초(史草)를 인용함으로서 실제로 세종실록과 대조한 결과 글자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쓴것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토벌작전의 주장 중심인물 李 蕆 先祖와 관련이 없는 동북방 개척사업 추진실적(함경도의 병마도절제사 김종서의 戰績)까지 여실하게 필사 수록되어있다는 점으로 보아 실록청 사관중 자신의 조상이나 문중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료의 일부를 복사하여 [西征錄]이라 이름 붙이고 가문에 비전(秘傳)한것을 이 순이 1516년에(약500년전)목판본으로 처음 간행한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판본으로 보존(板本 奎 4371호)되어 있는것입니다.


(서정록의 저자를 세종년대 李 蕆 선조와 동시대의 문신 천문 산학(算學)과학자 양성이씨 이순지(李純之)로 잘 못 알려지고 있으나 이는 착오입니다)


...........................................(1).................................................................


 이 서정록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에서는

역사상 수 없는 전란을 겪으며 국난을 극복하고 독립국가를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이 남긴 전통적 군사사상과 용병술등을 연구하기 위하여 1982년부터 위원회가 고병서(古兵書)와 군사관계 옛문헌을 발굴 번역하는 과정에서 서정록을 군사문헌집 제9집으로 펴 내면서 원 판본이 왕조실록 내용과 일치함을 눈여겨 보고 역대 왕조실록은 엄중히 비장되어 임금을 비롯한 신하 어느 누구든지 사사로히 열람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때문에  

이 책 서정록의 저자는.실록청 사관중의 한사람일것으로 단정하고

세종대왕실록 실록청 사관중 예안이씨와 덕산이씨문중 인물을 추적한 결과

李 蕆의 예안이씨와 같은 종파인 全義李氏 門中에서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한 이함장(諴長)과 기사관으로 참여한 이효장(孝長)형제분이 李 蕆 선조와12촌 형제간으로서 세종실록 사료를 직접 담당한 장본인으로서 가문의 명예를 빛내는 이천선조의 업적이 수록된 내용만을 가려 뽑아 문중에 비전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필사본은 그 후 이천 선조의 증손녀 이형문이 출가한 덕산이씨 문중에도 전해져 그 외현손인 이 순의 손에 의해 비로서 세상에 공개 되었을것으로 추측하게 되었고


 따라서 서정록에는 이 천 선조께서 1436년(세종18년 6월)부터 1440년(세종22년 7월)까지 만 4년간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전장에 종군하신 중  특히 여진족 정벌이 치열했던 초기 2년간의 전황및 전적 기록이 주를 이루고

조선 초기 조정에서 공조참판 병조참판을 두루 거치시며 과학기기의 발명과 제반 시책을 수행해서 공신의 반열에 오르셨고 정사 치사후에 원로공신 판중추원사로서 빛나는 세종대왕치적에 이바지하신 업적의 기록이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라면서  


 천수 76세(1451년.문종1년11월8일)에 卒하실때까지 조정 원로공신으로 빛나는 공훈과 倭侵平定 野人征伐등 무인으로 공헌하신 사적의 수기 전기가 전해 나려옴직한데 공의 玄孫(從仕郞公 沆)께서 중종기묘년대에 避亂 남하하신이래 사적 유품은 고사하고 분묘마저 실전한 후손들은 대대로 나려오며 不恭의 恨을 씻을 수 없습니다


 이제 타에 의하여 보전된 기록이지만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의 연구와 보존노력의 결과에 감사하고 새로 빛을 보게된 서정록을 통해서 顯祖 李 蕆先祖의 발자취를 詳考해 보기로 합니다. 

 

...................................................(2).........................................................

 

 

西征錄 卷末의 跋文(서정록 理解를 돕기 위하여)

                             跋      文

自古有天下國家者 未嘗無敵國外患 而其所征討之方 固當預爲之備也

靷(인)我國家介於靺鞨島夷之間 而寧少忽哉 世宗莊憲大王 繼承丕諸

勵精求治 相臣將臣 於斯爲盛 廟堂之上 筭無遺策 千里之外 催無勁敵

則彼蕞爾西賊 其敢犯天討而爲邊患耶 此西征錄所以作也

歲乙亥冬 予忝咸興觀察使尹相幕下 袖持一秩而來 諗于相公曰 此吾家所藏

而國朝西征之始 出師之盛 捕獲之多 在此一擧 況置六鎭 築行城 以固疆域者

亦此道之事 而國乘所載 秘而難覩(볼도) 請繡諸梓 以廣其傳 監司樂應之

又告通判金候 則金候亦樂應之曰 候業武人也 需供之費 我當助之 議以克合

三閱月而事功遂訖 蓋六韜奇畧 足以佐文武之策 圮上秘訣 足以爲帝王之師

是亦將家之一助也 噫觀世宗留意邊事 觀射後園 則文帝上林之射也

觀世宗引見師臣 屢賜衣裘 則高祖解衣之恩也 至於密諭密啓 反覆籌畵

則知兵之有法度 而機謀之不可不密也 行師誓衆 分道入攻 則知兵之有節制

而紀律之不可不嚴也 師還之日 親御正殿 執爵以慰 又命世子行酒

則知有功之當賞 而出軍之詩亦不可不歌也 豈徒施爲合古而己 然推如是之恩禮

能收如是之人材 以成不世之功者 實由我世宗之聖 而後世子孫之當法也

後西征元師 姓李諱蕆 於純爲外高王父 而官至判中樞 贈諡翼襄公

當世宗制作之時 多有所裨贊之.

                        

            正德十有一年季夏念後一日  都事奉訓郞 德豊李純拜跋


       奮義靖國功臣 正憲大夫 行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咸興府尹                                                   坡城君 尹 金 孫

                                           都事 奉訓郞 李    純

                                        通訓大夫 行咸興府判官 金 日 童

                                              校正 幼學 崔 世 淸

                                                   幼學 河    漢

                                              書寫 六房 金 鍊 石     

                                            監督 從仕郞 金 碩 仝

                   刻手   芿叱山 今孫 界同 莫同 獨金 接同 松阿之

                   

...................................(3)..........................................


            후     기  (발   문)

예로부터 나라에는 적대국과 외환(外患)이 없는때가 드물었으니, 그렇다면 이에대한 대비책을 미리 세워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조선은 말갈족(靺鞨族)과 왜국(倭國)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즉 이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세종대왕께서는 대통(大統)을 이어받으셔 훌륭한 정치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셨고 유명한 재상과 장수들이 이때에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안에서는 훌륭한 정책이 남김없이 수립되었고 천리밖 변방에서는 감히 항거하는 도적이 없게 되었으니 저 조그만 서북의 좀도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 국경을 넘볼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서북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한 서정록(西征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지난 을해년(乙亥年 1515.중종 10년)겨울 나는 함경도 관찰사 윤상공(尹相公 尹金孫)의 막하(幕下)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 서정록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가서 윤상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드렸다.

 “이 책은 저희 집에 소장해 온 것으로서 당시 서북방 야인정벌의 시말(始末)과 성대했던 출정 과정 포로를 비롯한 수 많은 작전 성과 등의 내용이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진(六鎭)을 설치하고 행성(行城)을 쌓아 동북 국경의 방어태세를 튼튼히 다진 역사적 사실등은 모두 우리 함경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현재 국승(國乘 조선왕조실록)은 비장(秘藏)되어 열람하기 어려운 실정이오니 이 책을 인쇄하여 세상에 널리 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관찰사는 기꺼이 호응하시고 또 통판(通判 도호부 판관)김후(金候)에게 알리니 김후 역시 흔쾌히 승낙하고 덧붙여 말하기를 ‘나는 본래 무관 출신이니 이 책을 인쇄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태 드리리다’ 하였다 그리하여 합의가 이루어져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대개 육도(六韜)의 기이한 책략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통일정책에 크게 기여하였고 다리위에서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은 장량(張良)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스승이 되었으니 이 서정록 또한 오늘날 우리 장수들에게 도움되는 바가 있을것이다.

.................................................(4)..........................................................

 아아 생각하건데 세종께서 변방의 일에 전념하시어 후원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신 뜻은 바로 한 문제(漢文帝)가 상림원(上林苑)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한 일과 같은 것이오, 또 세종께서 장수를 접견하시고 손수 의관(衣冠)을 여러 차례 내려주신 뜻은 한 고조(漢高祖)가 옷을 벗어 장수들에게 입힌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세종께서는 또 장수들에게 남이 모르도록 은밀히 효유하시고 그들의 뜻을 십분 받아들이시어 국방에 관한 계책을 신중히 세우셨으니 이는 군(軍)의 유일한 계통 질서와 작전기밀을 훌륭하게 지켜주셨음을 알 수 있으며 장병들이 준수해야 할 군령을 일일이 주지시키고 진공방면에 이르기까지 작전지도를 세밀히 하셨음을 보면 잘 통제된 군의 필요성과 규율의 엄격성을 익히 파악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징벌군이 개선하여 돌아오던날 세종께서는 친히 정전(正殿)에 납시어 출정 장수들에게 술잔을 권하셨고 또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술잔을 돌리게 하셨으니 이는 전공을 세운 자에게는 그에 마땅한 포상을 받아야 한다는 뜻을 보이시고 출거(出車)의 시편(詩篇)을 읊으셨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언행이 어찌 단순히 옛 법도에 합치된다고만 일컬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은혜와 예우를 베풀어 이처럼 훌륭한 인재를 포용하고 불세출의 뛰어난 공적을 이룬것은 실로 우리 세종대왕의 성스러운 덕화에서 비롯되었은즉 후세 자손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당시 서쪽 변경의 야인을 제2차로 정벌한 원수(元帥)는 그 성(姓)이

이씨(李氏) 이름은 천(蕆)이며 나의 외고조(外高祖)가 되시는 분으로서 벼슬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시고 시호(諡號)는 익양공(翼襄公)이시다

또한 그분께서는 세종대왕이 훌륭한 제도와 발명을 하실 당시 많이 참여하여 뛰어난 공적을 세우기도 하셨다


      정덕(정덕)11년 (1516.중종11)6월 21일

      

    도사 봉훈랑(都事 奉訓郞) 덕풍(德豊)출신의 이 순(李 純)은 삼가 쓰다.

     

1. 주 관 奮義靖國功臣 正憲大夫 行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咸興府尹                                                   坡城君 尹 金 孫

                                            都事 奉訓郞 李    純

                                         通訓大夫 行咸興府判官 金 日 童

2. 교 정                                       校正 幼學 崔 世 淸

                                                    幼學 河    漢

3. 필 사                                       書寫 六房 金 鍊 石     

4. 감 독                                     監督 從仕郞 金 碩 仝

5. 판각수                  芿叱山 今孫 界同 莫同 獨金 接同 松阿之


......................................................................( 5).........................................................................................

**종보 3호(2012.03 간행)에 계제된 (세종의 북방개척과 익양공 이 천의 "서정록")의 연속입니다.**

朝鮮王朝實錄 世宗朝編 索引表에는「李 蕆」諱字가 無慮 90餘件이 있고

(檢索할 수 없는)職啣만 記錄된 史蹟까지 160건이 넘는 翼襄公 史蹟이 있는데

(朝鮮王朝實錄中 翼襄公 李 蕆 史蹟表 (憲榮 編輯) 參照)

이 史蹟內容중 많은 部分이 公께서 平安道都節制使로 北伐중에 계실 때

세종임금께서 仔細한 戰略 戰術 諭示와 長文의 戰況 報告(馳報)內容이 많은데

君臣間에 이렇게 細密하고 또 頻繁하게 長距離間에 疏通되었음이 놀라웁고

實錄과 똑같은 內容이 西征錄에도 集約되어 있음도 밝힙니다


그 외 翼襄公을 빛낸 많은 著述 冊子와 硏究論文 심지어 大學校의 敎材까지 許多하게 많은 翼襄公 記事들중에 韓國科學技術情報硏究院 (KISTI) 이 發刊한

「과학향기」에 실린 눈에 띄는 記事를 여기에 轉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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