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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宗中事 記錄物

[스크랩] 2. 세종대 천문의기 제작 감독자, 이 천

by 우 송(又松) 2011. 9. 25.

 

 

 

 

▒▒▒  조선시대의 천문학자 - 2. 이천 ▒▒▒

 

 

П. 세종대 천문의기 제작 감독자 이천

 

"제왕(帝王)의 학(學)"으로서의 천문학

흔히들 고대국가나 봉건국가에 있어서의 천문학을 가리켜 "제왕의 학"이라고들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국가의 성립기인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당시의 경제생활이 수렵에 의존했건 농경에 의존했건 간에 "천사(天事)"를 중요시  했음을 말한다. 농업을 국가의 경제산업의 근본으로 하던 시기에 있어 국가나 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치력명시(治曆明時)"였다. 백성에게 시간과 계절을 알려줌으로써 농사에 편리를 제공하는 것은 왕권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견고히 하고, 그 정확함은 곧 권위의 상징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 하겠다.
동양의 역사에서 왕[支配者]과 백성[被支配者]의 관계를 표현해보자면, 왕은 하늘의 명[天命]을 전하는 자, 즉 하늘[天]이요, 왕의 뜻은 곧 하늘의 뜻이므로 백성은 왕의 뜻을 따름으로써 곧 하늘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자는 하늘의 섭리[天變現象]를 알아야 했으며 역(曆)을 만들어 시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천문학은 다른 여타의 학문보다 중요시 취급되었으며, 지배자가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학문이었으므로 "帝王의 學"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겠다.
여기에서는 우리 역사에 있어 과학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조선 세종대의 천문의기 제작사업에 감독을 담당하였던 무신이자 과학자인 이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익양공 이천 진영

 

П. 무신(武臣)으로서의 이천

 

조선 초기의 무신이자 과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불곡(佛谷) 이천은 고려 우왕(禑王) 2년(1376)에 경상도 예안에서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뛰어난 무술과 예리한 사물에의 관찰력을 발휘했던 그는 태조 2년(1393)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정7품 벼슬인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태종 2년(1402)에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태종 10년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하였다.
무인으로서의 이천은 세종 원년인 1419년 5월 왜구들이 충정도 앞 바다로 쳐들어 올 때 우군 첨종제(右軍 僉摠制)로 승진하여 활약하였다. 이때 세종은 총사령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토벌하여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역공하라는 명을 내렸다. 대마도 토벌 작전은 성공하였고, 여기서 이천의 전공은 매우 컸다. 결국 이를 인정받아 그는 종2품 무관급인 병마절도사(兵馬節都使)에 임명되었다.

 

П. 과학자로서의 이천

 

이천의 과학적인 재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였다. 그는 처음 천문학자로서가 아닌 조선(造船)에  있어 그의 재질을 발휘했는데 병선을 만드는데 있어 물에 잠기는 부분이 빨리 썩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갑조법(甲造法: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또한 선체는 크고 속도가 빠를 병선의 제조에 힘을 기울였고,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병선은 왜구의 토벌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과학자적인 재질을 세종도 인정하게 되어 결국 세종대왕의 야심 찬 계획의 하나였던 청동활자를 만드는 일에 그를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발탁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쇄술을 개량하여 다량의 서적을 편찬하는 것은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있어서는 정보나 지식의 보관 및 전달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서적의 보급으로 국민사상을 통일할 수 있고 국가의 정책을 알리는 효과 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금속활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 3년에 주조된 계미자(癸尾字)라는 금속활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인쇄도중 활자가 자주 움직이고 인쇄량도 하루에 기껏해야 두서너장 밖에 찍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천은 활자와 동판이 서로 맞지 않아 생기는 인쇄상의 결함을 개주(改鑄)하는데 성공하여 선명한 인쇄와 능률 향상의 효과를 보았다. 이것이 바로 경자자(庚子字)이다. 이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해 활자 크기가 작으면서도 주조가 정교하고 글자획도 박력이 있고 아름답다고 한다. 그 뒤 세종 16년 갑인자(甲寅字)라는 것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는 조선조 청동 인쇄기술의 백미이다. 이 갑인자 역시 이천이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여 이루어낸 결실이다.

 


1420년 '경자자'로 찍은 <자치통감강목>


1434년 '갑인지'로 찍은 <대학연의>

 

 

П. 천문의기 제작 배경과 이천

 

세종대왕의 재위기간인 1419년∼1450년은 다른 분야에서도 물론 그렇겠지만 우리나라 천문학 또는 기상학에 있어서 황금시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국책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업으로 천문기기, 기상기기의 제작이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성행했고, 또 이렇게 제작된 천문기기를 이용하여 천문·기상관측을 하였다. 이 천문·기상기기의 제작을 국책사업이라고 하고 또 세종이 이 제작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기기들이 농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세종 14년(1432)부터 시작된 천문·기상기기의 제작사업은 세종 19년(1437)에서야 완성을 보았는데 당시의 모든 학자가 참여한 대대적인 사업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하는데,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라고 하면서 예문관 제학인 정인지(鄭麟趾) 및 대제학 정초(鄭招)에게 천문·기상기기에 대한 과거의 내력 및 출전[文獻]을 연구케 하였고, 한편 당시 중추원사였던 이천과 호군 장영실에게는 천문·기상기기의 제작을 감독케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작된 기기로는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 혼의(渾儀), 혼상(渾象), 일귀(日晷), 앙부일귀(仰俯日晷), 자격루(自擊漏),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이 있다. 그러나,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렇게 만들어진 대부분의 기기들이 순수히 우리네 선조의 도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13세기 원(元)의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기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와 정초가 고전을 연구함에 있어서 원사(元史: 중국 元나라의 歷史書)를 그 모태로 하여 연구하지 않았나 한다. 참고로 곽수경의 기기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것은 당시 원이 극동에서 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때 그 정복과정에서 이슬람 문화가 원에 들어와 곽수경은 이를 토대로 기기들은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당시 조선에서 제작된 기기들도 이슬람의 영향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전통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천문의기(天文儀器) 제작사업과 함께 이천은 당시 호조판서였던 안순(安純)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건설의 책임을 맡아 모두 훌륭히 치러내었는데 이천의 감독 하에 만들어진 천문의상 및 간의대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간의대는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건설한 천문대로 대규모의 천문의상을 설치하기 위하여 만든 것인데, 그 높이가 31척(약 6.6m), 길이가 47척(약 10m), 넓이가 32척(약 6.8m) 정도되는 것으로 당시 원의 곽수경이 세운 관성대(觀星臺)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것이었다.


대간의(大簡儀)는 「원사」에 실린 곽수경의 법(法)에 의해 만든 것으로 천체의 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관측기기인데, 주천도(周天度)가 새겨진 적도환(赤道環)과 12時 100刻(당시에는 하루가 12시였음)의 눈금이 새겨진 백각환(百刻環), 그리고 중심과 수직으로 세워진 사유환(四遊環)이 이어져 있고 거기에 규형(窺衡)이 붙어 있어 적위를 관측할 수 있는 기기이다. 백각환은 1日 중의 시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눈금을 새긴 둥근 환으로 조선초기에는 1日을 100刻으로 했으나 시헌력 도입 이후에는 96刻으로 했다. 사유환은 적도환과 직교하며, 남북극을 축으로하여 동서로 회전하게 되어있고, 그 안에 규형이 있어 상하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규형은 속이 비어있는 통으로 이것을 통해 별을 관측하는 것이다.

이천이 책임을 맡아 건설한 간의대.
이 간의대는 현존하지 않으며, 문헌상의 자려를 토대로하여 가상적으로 그린 간의대의 모형도.

 

소간의(小簡儀)는 대간의를 간단히 만들어 휴대용화 한 것이다.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하는 혼천의(渾天儀: 渾儀라고도 함)는 일종의 측각기로,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있고 그런 까닭에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불린다고 「세종실록」에는 전한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태양시와 항성시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주야측후기로 세종 19년(1437)에 4개가 하나는 서운관에, 하나는 궁중에, 둘은 양계(평안도와 함길도)에 보내졌다.
이천이 위의 천문기기들을 어떻게 만들었는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세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에 제작 및 감독하였다고만 전해질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천이 이런 대대적인 사업의 총지휘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성공리에 제작사업을 마쳤기에-당시 서양이 과학적 분야에서 퇴보를 걷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세계 제 1의 과학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П. 다시 무장으로 돌아간 이천

 

세종 18년(1436) 이천의 간의대 제조로 천문의기 제작사업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양계(평안도와 함경도)의 변방에서는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졌는데, 평안도 도절제사 등이 이를 평정하지 못하자 세종은 지난날의 용장 이천을 기억하며 세종 19년(1437)에 그를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이천은 야인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야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야포를 개발하여 야인을 크게 파하고 정헌호조판서(正憲戶曹判書)의 영예를 안았다. 이때가 그의 나이 61세 되던 해였다.
그 후, 이천은 군기감 제조로써 화포주조에 남은 생을 바쳤고, 1450년에는 다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러 임금[文宗]으로부터 궤장[지팡이]을 하사받았고, 문종 원년인 1451년 11월에 76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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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맑은 물 흐르는 곳 (나들목공동체)
글쓴이 : 들풀처럼 원글보기
메모 : 익양공 이 천은 본인 이헌영의 20대조 이십니다 익양공 이 천을 홍보해 주시고 선조를 흠앙케 해주셔서 감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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