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 타국 미국과의 소식 전달이나 국내에서의 서로간 소식 전달이 매양 지근 거리인데
미국(L A)에 딸이 거주하는 까닭으로 이근영네가 이민 이전에 진베없이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2004년 상처 이전에 미국 내왕할때마다 나는 딸네집보다 이근영네집엘 가는게 더 즐거웠습니다
미국 국내선 비행기 두시간 거리의 OREGON주 PORTLAND에 사는 이근영네 4형제분들은
모두 각각 사업이 번창하고 부자로 여유롭게 살고들 있어서 내가 몇달씩 폐를 끼쳐도 무방했었으니까요
더구나 이근영은 고교시절은 선배로 또 같이 대전거주시에는 친 형제와같은 교분이었는데
1970년대에 4형제가 노모 모시고 이민가서 각각 성공한 이민 모범 케이쓰였었는데 ...
그 당시의 내 앨범을 뒤져 봐도 포틀랜드에서 근영씨와 찍은 사진만도 전후 네차례나 될 만큼
오히려 딸네집 보다 더 자유롭고 4형제들에게서 맡형(?)으로 우대받던 즐거웠던 추억이 떠 오릅니다
전후 여덟번 도미했던중 미국 서부일대를 근영씨와 관광한 곳이 더 많았다면 ...할 말 없죠 ㅎㅎㅎ
가끔 전화 할때마다 서로 오라고는 하였지만 언제부턴가 "고소공포증"타령에 오라는 소리는 못 했고
셋째 되는 만영씨의 급작스런 사망소식 후로는 더 시시덕거릴 수 없어서 자연스레 소식이 두절되었는데 ...
농한기 시간 여유 있는 둘째가 제 동생덕에 몇차례 미국을 왕래하기에
근영씨와 동헌내 소식을 백방으로 탐문해 보랬더니 반갑지않은 소식 근영씨의 별세소식을 알려 왔네요
앗!!!, 이 근 영, 근영씨가!! 이젠 서로 사별 할 나이들이니 그렇게 깜짝 놀랠 일만도 아니지만 ...
나 보단 두 살 아래인 1933년생이니 죽을 나이 이기는 당신이나 내나 매양 한가지이지만 ...
노후 가짓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복을 타고 난 인생이라고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
학교 다닐때 등하교 길에서나 교내에서나 "내가 네 형이다"가 둘을 끈끈히 이어 주었고
내가 군복무중일때 이근영서기가 내집엘 저집 드나들듯 오가며 내 소식을 물었던
또 대전에 나와선 소위 운수업을 한달 때 매번 회포대종이 과자봉지를 우리 애들에게 갖다 주던 일
내가 퇴근할땐 으례 역전 도매시장 단골 술집에서 둘이 놋대접 막걸리잔에 엄지손가락이 푹 잠기도록
따룬 막걸리를 선체로 쭈ㅡㄱ 마시고선 가게로 가서 오늘 이야기들을 늘어 놓던 일, 이런 한량없는 이야기 보다
미국으로 떠난후 소식 두절되었다가 ...
(이근영에 대하여 하고싶은 말 여기에 쓰고 싶은 말 태산이니 일단 쓸 자리 차지해 놓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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