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광복절만 되면 해방된 그날을 많이 회상하게 된다
1945년 8월15일, 내 나이 열다섯살 농업학교 1학년때 말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개교이래 처음으로 두사람이나 중학교에 입학하였다고
온통 면내가 환영일색이었지만 막상 입학한 보은의 농업학교에선 종일 농삿일만 하였는데
실습지 일정보가 넘는 전답을 1 2학년 80명이 밭작물과 벼농사를 실습명목으로 가꿨는데
특히 산 아래 비탈밭을 평지로 만들고, 논에 모를 심고 벼논 논매기하는일이 참으로 힘들었다
지금은 논 매는일이 없어졌지만 벼가 활착하고 발육할때에 뿌리를 튼튼히 성장시켜야 한다고
형식적으로 흙탕물만 이르킨다고 벼논에 물을 다 빼고 논 바닥의 흙을 완전히 뒤집어야 하는데
20센치가 넘는 호미 날로 흙덩이를 뒤집는일을 날마다 종일 했다면 지금 상식으로 납득이 갈까?
두벌 세벌 맬때쯤엔 검풀은 왕성한 벼 잎에 앞 가슴과 팔뚝이 긁혀 소년들의 상체가 시뻘겋게 변했고
또약볕을 온몸으로 받는것은 물론 엎드린 논바닥에서 확 확 달어오른 열기는 숨을 멎게 하였고
짤막한 아랫도리 밖으로 전신이 검게 끌어서 마치 열대지방의 야인 소년들을 빼 닮은 몰골 들이었다면 ...
그 그 소년들이 군수용 필수 송탄유(松炭油)를 짜기 위한 솔뿌리 캐기 근로봉사에 학교 전체가 동원되어
산골 보은땅의 오지 회인면 회인장터에서 2주간씩 합숙하며 벌체한 소나무의 아람들이 솔뿌리를 캐는데
학생 2인 1조가 하루 한뿌리를 캐어서 산 아래 송탄유 착유장으로 굴려서 운반하던 일을 지금 회상하면 ...
그때 합숙소에서 아침이라고 주먹밥 한개를 먹고 나눠주는 도시락을 앞뒤로 흔들면 밥이 뭉쳐저서
좀 큰 인절미 하나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날롬 입에 털어넣고 빈 도시락만 허리에 차고 산에 올라갔으니
허기진 배를 체우기 위해서 2인1조가 몰래 부락에 기어 들어 보리개떡이라도 얻어 먹은날은 재수 좋은 날,
만약에 만약에 지금의 학생들에게 이런 체험을 시킨다면 ...참으로 천태만상 소동이 눈앞에 전개될것 ㅎㅎㅎ
그래도 그래도 영광스런 중학생들에게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 벼 논을 다 매 놓은 8.16일부터라고
입학한 4월5일 이래 비가 와야만 들어갔던 교실에 1 2학년을 한 교실에 뫃아놓고
내일 부터 3일간 집에서 부모님 농사일 도와라, 음식 과식하지말라, 깊은 물에 가지 말라등 등
나까노 고쬬, 히로와다리 센세이, 다음에 가네보시(단또) 센세이까지 차례 차례 훈화가 계신 다음
이내 정오쯤에 당장 알 수도 없고도 뜻밖에도 나까노고쬬센세이로 부터
다이또아센소 고후꾸 (대동아전쟁 항복)에 따라 각자 귀가해서 추후 지시 받으라, 는..
장중하고 의미심장한 말씀만 듣고 어안이 벙벙한것이 내가 맞은 8.15인데 ...
그때 내 나이는 명색 중학교 1학년의 열다섯살 나이,
무얼 알고 판단하고 처리할 지적 능력을 가추었겠는가?
그때는 국교때부터 고꾸고조요(國語常用)해서 갓다소 닛뽕 단지데 갔다소. 라던지
미요도까이노 소라아께데 ...(보아라 동해의 하늘이 열린다)등등의 힘찬 노랫소리는
지금의 군가를 뺨칠 만큼의 힘찬 공용의 노래가 모든이에게 힘을 솟게 하였잔은가?싶다
이미 정신력이 일인화(日人化)한 청소년들은 해방후 격동기를 겪으면서 한글 해독하면서
비로소 한사람의 한국인이 되어갔고, 결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의 일인화를 나무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런점으로 판단하면 지금 생존한 애국지사분들 100세에 가까운 극노인이 아니라면
1945년 이전 일제시대에 년소한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자이고 희소한 우국자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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