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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의 추억 (2014년 2월 14일 오전 06:19)

by 우 송(又松) 2014. 2. 14.

"정원 대보름의 추억" 을 이야기한다면 약 80년전의 사실이니

근현대사에서 다룰 역사이야기가 될 수밖엔 없겠는데...

여든네살 노옹이 철 들기전부터의 희미하지만 확실한 사실을 늘어 놓겠다

가렴주구하는 왜정 말기이기는 하지만 동리마다 큰 행사인 동고사(洞告祀)가 있었다.

 

어제 (2/13) 대전 중구 태평동엘 갔었는데

태평동 중심 도로변의 고목 느티나무(소공원)앞에

느티나무제를 알리는 현수막과 그 느티나무를 보면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태평동의 안녕을 비는 擧洞的 행사가 유전되고 있음에

전통계승에 대한 존경심과 내가 겪은 동고사(祭)를 회상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만은

이 느티나무제도 태평동이 온통 한마음으로 정성끝 치성을 드리는 아름다운 축제로 전승되기를 바라면서

내 고향 보은 장안면 구인리의 동고제가 지금은 신지무니 없어졌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사실과 견주어진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때쯤 정월대보름은 며칠전의 설날에 이은 큰 축제날이었었다 

정원 대보름날 잠 자면 눈섭 시어진다고 어거지로 잠을 참고 견디다가 자정 지난 첫새벽에

동구밖 느티나무 아래서 올리는 동고제를 온 동리 아이들이 다 모여서 엄숙한 자세로 뒷전에서 구경하면서

제주가 상촌에서 부터 아랫말 누구댁의 대주이름까지를 낫낫치 주어섬기면서 올리는 소지를

그 소지(燒紙)종이가 잘 타 올라가는가를 지켜보면서 우리집 소지종이가 높이 높이 올라가기를 마음조리며 빌었고

이내 고사가 끝나고 제주가 떡시루와 제물을 한짐 지고 집으로 돌아갈때를 기다려

제를 마치고 사방에 떼어 놓은 백설기 떡 조각을 젭싸게 집어다가 손톱만큼 나눠 먹으며 또 제주댁으로 뒤 따라가서

고사지낸 (성스러운)떡을 한입 넣을 만큼씩 얻어먹으면서 고사지낸 집 마당에 다 모였음직한 아이들끼리 더위를 팔기 시작한다  

물론 많은 어른들도 고사지낸 댁에 모여들면서 치성에 고생 많았다는 덕담과 음복술로 거나해지시면서

풍물(농악)을 치면서 동리축제도 시작이 된다 

 

아이들은 보름날 첫새벽 바로 지금 시간쯤 미명의 첫 새벽에 더위를 팔아야했었다

집안 어른이나 가족들에게는 그런 신통력은 없었던 것인지  

집밖 고삿을 설치며 또래들 동무들에게 "기영아"하고 불러서 "응"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일상 동무들끼리 (應口對接) 호명하면 당연히 대답했던 그 "응"을 무의식속에 실수로 대답하면 더위를 산 셈이다

아침 해뜰때까지 몇자루의 더위를 팔아야 올 여름엔 더위를 안 먹겠다고 신바람이 나는데

한 자루도 못 팔았으면 동무네 집 사립문앞에서 "기영아 !!"하고 불러도 부시시 문 열고 나올지언정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해가 뜨면 더위팔기의 신통력이 자연 소멸되고 학교에 가서도 "더위팔기"가 큰 화제거리였고

 

보름날 밤인가 열엿셋날 밤인가는 책력을 보아서 공론해 결정해 주시던 어른들의 결정에 따랐지만

저녁 먹고 어두어질때쯤 뒷메(뒷산)에 올라가서 쥐불놀이를 하면서 "망월"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제각기 집단을 길죽하게 묶은 쥐불에 불을 붙혀 휘두르면서 쥐불놀이를 했었고

훨신 후에는 (해방후 깡통이 많아지면서) 구멍 뚫은 깡통불을 휘두르는 신형 쥐불로 바뀌었고

컴컴한 동쪽하늘이 차차로 밝아지면서 뾰족히 보름달 만월이 뜨기 시작하면

어른 아이 할것없이 온 동민들이 휏불뒤에 모여서서 "망 월"하고 제일 큰 소리로 몇차례고 연속 왜치던게

우렁찬 합창이었고 온 동리 합일의 상징인 망월(望月?)행사의 절정이었다.   

 

 

 ▲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열린 달집태우기 행사.     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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