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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松 이헌영의 blog 입니다
그룹명/宗中事 記錄物

禮安李氏 世居之碑 (集姓村 探訪記 포함)

by 우 송(又松) 2010. 7. 30.

2010 07.30에 뒤늦게 생각이 미쳐,

종중기록물 사진등을 한글문서 또는 유인물 책자등에서

찾아가면서 가급적 전부를 여기에 옮겨 싨기로 하였습니다

 

 

 

 

 

 

禮安李氏世居之碑文

東쪽 멀리 小白山 줄기 九屛山은 屛風같이 둘러있고 마을앞 山

玉女은峰 新羅三築造三年城을 西北으로 마주보는 中央地가 報恩땅 求

仁里로 禮安李氏 世居地이다.

始祖 諱棹는 高麗太祖가 三國統一을 이룩할때 大功을 세운 高麗統合

三韓開國翼贊功臣太師로 반성節이며 全義人이다  諱棹字는 太祖가 公의

功勳을 致賀한 賜名이며 公의 墓所는 全義李城山下   良閒洞에 있고

公의 先山은 公州錦江北案枾木洞에 있다 二世에서 七世까지 獨身繼

代로 三省六府 宰相을 지냈으며 八世에 三兄第인데 伯은 大司成緯子

原이요 仲은 高麗壁 上 三韓섬議政丞 일 文莊으로 緯混이며 禮安李氏의

中始祖이고 季는 典書緯子華인데 三兄弟墓所  失傳으로 始祖墓下靑龍녹에

追遠壇으로 奉安하였으며 九世緯彦昇은 大將軍이고 十世緯翊은


寶文閣提學으로 移實禮安하니 六三十餘年이 된다   十一世緯昇은 成

均館齊酒이며 十二世緯속은 軍部判書인데 后配父인 政丞廉悌臣禍中에서

九世에서 十二世까지 四代墓所 失傳으로 서울 月溪洞 格心寺에

設壇으로 奉安되어 있다.


世宗代 出將入相의 名臣인 諡翼襄緯蕆은


報恩派直祖로서 庚寅武科重試에 及第한後 世宗二年庚子(一四二十)

銅鑄活字를 發明創製하였으니 이活字가 -四五O年 獨逸人 구덴베

르크가 製造한 銅鑄活字보다 三十年이 앞선 世界公認의 最初金屬活

字로서 文籍刊行에 新紀元을 이루었다 大提學 卞季良은 朝鮮의 萬歲

토록 끝없는 福이다라고 跋云하였고 直提學 金빈은 鑄字之文선

爲盡美誠朝鮮萬歲之寶也 極讚跋文하였다.

公이 創製한 活字로 世宗大王은 -四四九年 부처님 一生을 訓民正音으로 讚揚한 長篇詩 月印千江之曲 印刷版 一部를 五百四十二年이 되는

辛未(一九九一)年九月二十五日 盧泰愚大統領은 UN 總會에서 歷史的

UN 加入 演說을 한 後 UN 本館 메인로비에 文化膳物로 寄贈 永久

揭示하니 이를 본 世界萬邦人들의 驚漢은 勿論 韓國이 文化國임을

자랑하는 壯擧이기도 하다. 公은 科學的 才量이 非凡하여

簡儀圭表聲 自擊漏. 觀側器. 司진玉漏. 빈風圖 天球儀 仰俯日晷外에도 많은

科學利器를 補助 嶈英寶公 等을 指揮發明하였으며 其外火砲. 槍劍 馬蹄等

兵器의 改良과 築城等 國防에도 全力을 傾注하였다.

밖으로는 一四九一年 南侵倭敵의 擊退와 麗末 以後 平安道 邊境에

자주 侵入하여 百姓을 殺傷 掠奪을 恣行하는 오량캐 凶賊의 掃蕩을

爲하여 世宗大王은 公을  平安道 都節制使를 除授하니 公은 丙辰年

(一四三六) 任地에 到任軍士의 操鍊과 軍糧과 軍馬의 確保를 徹底히한

後 軍士를 두길로 나누어 江界와 滿浦口子를 건너 옹村吾自岾 吾彌府

等의 敵을 破竹之勢로 討伐하고 다음해 丁巳年에는 婆猪江을 건너

흘刺山城과 阿開물地方까지 繼續追擊하여 오랑캐 酋長李滿住凶賊을 蘇

子江上流멀리 完全擊退시키니 이때에 비로소 現國境線이 確定된 것

이다.

丙辰年 十月과 丁巳年 七月 두차례에 亙하여 世宗大王은 公의 戰捷을

致賀한 論書를 내리니 王朝實錄에 記錄世傳되고 있다. 光復後 政府는

陸軍士官生徒들로 하여금 盡忠報國⦆精神涵養의 殿堂으로 -九七七年

十二月  台陵 陸軍士官學校庭에 公의 諡號를 銘한 翼襄館을 建立하

였으며 또한 -九八五年五에는 韓國民族 文化를 빛낸 偉大한 先

賢五十人中에 公을 科學分野 先賢으로 推천하니 이 榮光永遠히 빛날

것이다.

一五一九年 中宗代 己卯士禍가 蜂起하니 公의 玄孫  十七世從士郞

諱沆十八世   敎授諱擎은 漢陽을 버리고 落南報恩땅 吉祥洞으로 避禍

隱居中   翼襄公以下 四代 先瑩이 失傳되여 梧倉里 臥牛山麓에 追遠閣을

建立하고 內部左上에 世宗大王論書板을 奉揭하고 右下에 公의 實記碑

를 建立하였으며

東便에는 公의 設壇과 松谷洞에는 直孫 三代의 設壇을

奉安하고 春秋祭享을 奉行하고 었다

落南 七十年 되는해에 二十一世 進士諱命弘은 本洞으로 移居하였으며

二十二世 諱成晩 段晩 兄弟가 本縣守李公審과 아우 李相 公審을 尋謁時

居住洞名貴神郊는 不吉하니 求仁郊로 改洞名을 勸告받아 이때부터

洞名이 된것이다

二十五世 嘉善大夫諱顯黙 二十八世 禮山郡守諱洪烈

嘉善大夫 諱庭穆義禁府都事  諱廷翼等의 많은 後裔들이 報恩 靑山牙

山咸昌等地에 集姓村을 이루고 其外 京鄕 各地에 散居하고 있다.


아우인 十三 諱韞도 太宗辛巳年  文科에 及第하여 判軍器監事를

거쳐 吏曹判書에 이르니 兄第共히 文武兩班에서 立身出世하였으며,

公의 玄孫 十六世 諱寞은 中宗戊子年  文科에 及第하여 左議으로

淸白吏에 錄薦되었고 諡貞簡이다.

有名한 學者로는 二十一世  贈吏曹判書 諱惟樟號孤山과

                二十二世  贈吏曹判書 諱柬號巍巖이 있으며

特히 諱련은 性理學者로 江門八學士의 한분이며 其外 各界에 名士와 高官이 줄을 이어 輩出하였다.

集姓村으로 金浦 安東 全義 洪州 水原 溫陽 等地가  있으며 特히 溫陽의

外岩里는 國家가 指定한 民俗村으로 有名하다.

-九九O年 庚午 洞계時에 本碑 建立을 發議 贊成해 주신 洞民 僉位와

建立進委員으로 勞苦가 크신 金商俊 裴在球 金洵 李相浩 宗人으로

洪植 亨植 昇植 準基 憲榮과 外地宗人 諸賢들께 衷心으로 感謝를 드린다.


                              禮安李氏   落南  第四百七十二 週年

                                            西紀一九九一年  辛未  四月

                                     翼襄公 十八代孫後學準騎謹撰

                                     吏判公 十六代孫後學用茂謹書

                                     求仁里 洞民謹竪


                   建立推進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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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當時의 案內狀과 憲榮이 筆記해 둔 除幕式 狀況을 아래에 添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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案內狀

謹啓時下 九秋楓菊之節을 맞이하여 尊體錦安하옵시고 寶覃諸節이

均慶하심을 仰賀旦祝하옵니다.

就而白 西紀1519年 中宗14年 己卯士禍때 17世祖 從士郞公 諱沆字께서

落南하신지 472週年을 맞이하여 禮安李氏世居之碑를 建立하고

그 除幕式을 아래와 같이 擧行하고자 하오니 多忙하실줄 思料하오나

掃萬 往臨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이에 案內狀을 올리나이다


日時 : 1992年11月5日 (陰10.11) 木曜日

場所 : 忠北 報恩郡 外俗離面 求仁里

서울 出發場所 : 瑞草區 蠶院洞 뉴코아百貨店 駐車場 (略圖參照)

     出發時間 : 11月5日 午前8時30分

     車   便  : 서울     號  觀光버스 (當日 午後 歸京)


1992年   10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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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5일 世居之碑 除幕式 狀況 略記(憲榮 筆記 備置)

1. 일시:1992년 11월 5일(음력 음 10월11일) 12:30경

2. 장소: 求仁里 竪立 現場

3. 참석인원

   서울에서 대종회장 회덕씨 용만씨 용범씨 용탁씨 회옥씨

   (미상 한분)제씨외 준동 준표 일행(송은찬포함) 합 약 30명 BUS한대로     

   래도    외 준용씨 일가족 3인과 만직 준철씨

   기외지역: 안동 풍산에서 BESTA한대에 용구 용벽 건직씨등 일행 10명

   청주에서: 현임상무이사차로 전지회장 연세씨 합 3인

   창원에서: 용무씨(근서하신분)

   전주에서 한 분(함자 미상)

   대전에서: 선교차로 흥선 헌주 헌영. 직선 재선 교선 준용

   청주에서: 국선 은선 각각 차로 오셔서 총 약 50명이 제막식 참석

4. 식순: 제막한 후 국민의례 감사패수여(죽전석재 박남근사장)

   경과보고(형직)축사종회장(준기)이흠수 성균관 전교)종인대표 헌영인사

5. 일행 서울버스로 하개리 복해가든가서 삼계탕으로 점심식사후 현지해산

6.기타 상준씨댁 마당에 마련한 주연장에서 래빈 간소하게 대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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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신문 기자가 쓸 "집성촌탐방기"의 자료를 기자에게 메일로 보내고

그 원고를 여기에 옮겨 둡니다**

      

               집성촌 탐방  (초고 자료)


외속리면 구인리  예안이씨(禮安李氏)


보은군 외속리면 구인리는 이조중종년대(약480년전)부터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다.

 예안이씨는 고려태조께서 삼한통합시 대공을 세우신 전의 이태사공(고려삼중대광태사 휘 도)이 시조로서 원래 전의이성으로, 2세부터 7세까지 삼성육부 재상을

지냈으며 충렬왕대에 8세3형제분이 3분파조로서 중씨 첨의정승시문장공 휘 혼의

고려보문각 제학공 휘 익께서 예안으로 이관하여 중시조가 되시니  시조부터 8세3형제분까지 10위가 충남 전의 이성산하에 시조묘소와 영사제 경원사에 봉안되였고  9세부터 13세익양공 휘 천. 이판공 휘 온형제분까지 5대는 옛양주 북산땅(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당시의 사패지지로서 대대상전한 각심제(서울시지정문화제)의 추원사에 봉사되어 있는바, 이조중종조 기묘사화(1519년)때 익양공의 현손17세종사랑공 18세혜민서교수공 부자분이 보은땅 길상.구인일원에 피화은거하여 이래 정착케 되었다.

13세조 익양공께서는 이조 세종조의 장군과학자이신바 충청 경상 병마도절제사로서 대마도정벌과,  함길 평안도절제사로 야인정벌 육진개척과 화포 병선의 개량에 큰 공적을 싸을때 세종대왕께서 유서를 나리셨고  내직에서 지중추원사겸공조참판으로 주자소를 설치하여 조선만세지보라고하는 세계최초 금속활자 갑인자를 개주하여 문적간행에 신기원을 이루웠고 공역을 감장하여 혼의 자격루 앙부일귀등관측기구제작과 천문과학 발달에 이바지한 문무겸전의 공적이 문헌과 실록에 뚜렸함으로서, 정부에서는 육군사관학교과학관을 공의 시호를따서 익양관이라고 명명하였으며 5천년 역사상 민족문화를 빛낸 선현50인중 과학분야인물로 선정하였고 1993년 4월을 “이천의달”로 정하여 공을 추모 현창하는등 공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공의직손이 구인일원에 세거하며 자손이 번성하여 명문거족으로 형세가 굳혀졌음에 이성선적지 오창리(보은-상주국도변)에 세종유서판과 공의 실기비를 추원각에 모시고 있고  최근에 세전제실을 개건하여 여기에서 실전선조단소와 구인앞산50정에 봉안된 선영향사를 매년음10월2일 시조제향후 첫일요일에 아울러 모심으로서 이날을   숭조의날이자 전국에 산재한 자손의 “만남의날”로 정착시키고 있다. 

 공의 계씨 이판공은 그의증손 좌의정 휘 명에이르기까지 자손이 번창하여 전국에 확산된중 안동풍산의 예안이성은 안동4성중 거성으로 성리학자 고산넌생과

명문거유가 수없이 배출되였고,  온양외암리의 도지정민속마을에는 강문8학사의 한분인 외암공의 생거지로  이조말엽까지의 고관 명사가 집집이 살아계셨던 흔적과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있어 탐방객이 줄을 잇고 있다.  (후손 헌 영 근고)




                集姓村 探訪  (草稿 資料)


外俗離面 求仁里  예안이씨(禮安李氏)


보은군 외속리면 구인리는 李朝中宗年代(約480년前)부터 禮安李氏의 集姓村이다.

 禮安李氏는 高麗太祖께서 三韓統合時 大功을 세우신 全義 李太師公(高麗三重大匡太師 諱 棹)이 始祖로서 元來 全義李姓으로, 2世부터 7世까지 三省六府 宰相을

지냈으며 忠烈王代에 8世3兄弟分이 3分派祖로서 仲氏 僉議政丞諡文莊公 諱 混의孫

高麗寶文閣 提學公 諱 翊께서 禮安으로 移貫하여 中始祖가 되시니  始祖부터 8世3兄弟分까지 10位가 忠南 全義 李城山下에 始祖墓所와 永思齊 景遠祠에 奉安되였고  9世부터 13世翼襄公 諱 蕆. 吏判公 諱 韞兄弟分까지 5代는 옛楊州 北山땅(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當時의 賜牌之地로서 代代相傳한 恪心齊(서울시지정문화제)의 追遠祠에 奉祠되어 있는바, 李朝中宗朝 己卯士禍(1519년)때 翼襄公의 玄孫17世從仕郞公. 18世惠民署敎授公 父子分이 報恩땅 吉祥.求仁一圓에 避禍隱去하여 以來 定着케 되었다.

13世祖 翼襄公께서는 李朝 世宗朝의 將軍科學者이신바 忠淸 慶尙 兵馬都節制使로서 對馬島征伐과,  咸吉 平安都節制使로 野人征伐 六鎭開拓과 火砲 兵船의 改良에 큰 功績을 싸을때 世宗大王께서 諭書를 나리셨고  內職에서 知中樞院事兼工曺參判으로 鑄字所를 設置하여 朝鮮萬世之寶라고하는 世界最初 金屬活字 甲寅字를 改鑄하여 文籍刊行에 新紀元을 이루웠고 工役을 監掌하여 渾儀 自擊漏 仰釜日晷等觀測器具製作과 天文科學 發達에 이바지한 文武兼全의 功績이 文獻과 實錄에 뚜렸함으로서, 政府에서는 陸軍士官學校科學館을 公의 諡號를따서 翼襄館이라고 命名하였으며 5千年 歷史上 民族文化를 빛낸 先賢50人중 科學分野人物로 選定하였고 1993年 4月을 “李蕆의달”로 定하여 公을 追慕 顯彰하는등 公의 業績이 再照明되고 있다.

 公의直孫이 求仁一圓에 世居하며 子孫이 繁盛하여 名門巨族으로 形勢가 굳혀졌음에 李姓先跡地 梧倉里(보은-상주국도변)에 世宗諭書板과 公의 實記碑를 追遠閣에 모시고 있고  最近에 世傳齊室을 改建하여 여기에서 失傳先祖壇所와 求仁앞산50町에 奉安된 先塋享祀를 매년음10월2일  始祖祭享後 첫日曜日에 아울러 모심으로서 이날을   崇祖의날이자 全國에 散在한 子孫의 “만남의날”로 定着시키고 있다. 

 公의季氏 吏判公은 그의曾孫 左議政 諱 蓂에이르기까지 子孫이 繁昌하여 全國에 擴散된중 安東豊山의 禮安李姓은 安東4姓중 巨姓으로 性理學者 孤山先生과

名門巨儒가 수없이 輩出되였고,  溫陽外岩里의 道指定民俗마을에는 江門8學士의 한분인 巍巖公의 生居地로  李祖末葉까지의 高官 名士가 집집이 살아계셨던 痕迹과 遺物들이 잘 保存되어있어 探訪客이 줄을 잇고 있다. (後孫 憲 榮 謹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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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보은신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집 성 촌 탐방

    고려 태조때 전의이씨 태사공 이 도 시조

          조선시대 과학자 익양공 이 천선생의 후손들....(보은신문98.7.18자 제409호)

외속리면 구인리 예안이씨

 외속리면 구인리는 4백80년전부터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다.

예안이씨는 고려태조때 삼한통합시 대공을 세우신 전의이씨였던 태사공 이 도가 시조이다. 시조이 도는 원래 전의이씨였는데 2세 이강부터 7세까지 삼성육부 제상을 지낸 바 있다. 충렬왕때 8세 3형제분이 3분파조로 둘째였던 첨의정승 시 문장공 이 혼의 후손이다. 고려 보문각제학공 이 익께서 예안으로 이관하여 중시조가 되었고 시조부터 8세3형제분까지 10위가 충남 전의 이성산아래에 시조묘소와 영사제 경원사에 봉안되여 있다.

 9세 이언승부터 13세 익양공 이 천과 이판공 이 온형제분까지 5대는 옛양주 북산땅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당시의 사패지지로서 대대상전한 각심제(서울시 지정문화제)의 추원사에 봉안되여있다.    조선 중종 기묘사화(1519년)때 익양공 이 천의 현손 17세 종사랑공 이 항과 18세 혜민서교수공

이경종 부자분이 보은땅 길상리와 구인리 일원에 피화은거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13세 이 천(1376-1451)은 조선 세종때의 과학자이며 무신이였다. 자는 자견 호는 백곡 군부판서 이 송 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에 17세의 나이로 별장에 임명되었고 1402년(태종 2)에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10년(태종 10)에 무과중시에 급제하였다.  도지총제를 거쳐 경상도 조전절제사로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큰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을 만드는일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 틈틈히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했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1420년(세종 2) 공조참판으로 임명되어 왕명으로 세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를 만들었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고 1434년에는 지중추원사로 경자자를 개량하여 갑인자를 완성하였다.   20여만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해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 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호조판서로 재임할 때에는 정초. 장영실. 김빈등과 대간의 소간의 앙부일구 현주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이밖에도 야인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주철을 연철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 대포를 만드는등 화포의 개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450년 다시 중추원사가 되고 1451년 판중추원사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 받았다.  이때 시호는 익양으로 묘소가 실전되어 외속리면

오창리에 단소를 설치하였고 세종대왕 유서판과 실기비를 세운 추원각이 건립되어 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 과학관이름을 익양공의 시호를 따서 익양관으로 명명하고 있으며 5천년 역사상 민족문화를 빛낸 선현50인중 과학분야인물로 선정되어 1993년 4월을 이 천의달로 정하여 공을 추모 현창하는등 공의 업적이 제조명되고 있다.   익양공의 후손인 18세 이 경 종(1498-1561)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자는 효신 종사랑 이 항의 아들이다. 중종때 의학교수에 임명되었으며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보은읍 길상리에 은거하였다. 충암

김정과 병암 구수복등과 교유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시서를 즐기며 자손을 훈도하였다.

 이 경 종의 아들인 이 언(1528-1593)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1579년 성균진사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나어자 조헌의 의병에 참여하였으나 1555년에는 보은현감 성제원과 더불어 상현서원을 삼년산성안에 창건하였다.

 현재 예안이씨 문장공파는 익양공 이 천선생의 직손이 구인리 일원에 세거하여 자손이 번성하여 명문거족으로 형세가 굳혀져 오창리에 위치한 추원각 세전제실을 최근에 재건하여 실전선조 단소와 구인리 앞산 50정에 봉안된 선영향사를 시조제향후 음력10월 첫 일요일에 모심으로서 이날을 숭조의날이며 전국에 산재한 자손의 만남의날로 정착시키고 있다.

       예안이씨 초고를 써주신 이헌영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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