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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의 과학자 - 세종대왕, 이천, 이순지, 정인지, 장영실

by 우 송(又松) 2010. 11. 16.

 

 

 

 

 

 

 

 세계 최고 과학 수준 자랑한 세종 시대 과학자들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난 과학자 있었다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는 □□□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질문에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장영실이다.
그러나 국내 과학사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장영실이 비록 천재적인 기술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당대 최고 과학자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드라마 방영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세종대왕 시대의 최고 과학자는 누구일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를 3명 들라면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꼽고 싶다”며
“장영실은 일반인들에게 최고의 인기 과학자이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최고로 꼽히는 과학자는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세계 최고 과학이 꽃핀 세종시대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도 “세종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면 이순지와 이천”이라며
“강의를 해보면 학생들도 오직 장영실만 알고 그를 최고로 치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취재한 다른 과학사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학계에 따르면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 과학사학계의 원로인 전상운(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박사는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학회’에서 15세기 전반을 세종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낸 <과학기술사 사전>에도
세종시대 세계적인 과학기술 업적이 29개나 실렸을 정도다. 같은 시기 중국은 3, 4개, 일본은 아예 없었다.
전 박사는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런 업적을 이뤄낸 과학자들은 누구일까?

 
                      

 


세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과학 프로젝트 중 하나가 천문학,
당시 동양 용어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시간을 알아낸 역법이었다.

 

세종 시대에 중국의 역법을 뛰어넘어 우리만의 역법이론을 세운 과학자가 바로 이순지다.
실록에 따르면 병약하다고 알려진 이순지
세종의 명을 받아 조선 고유의 역법 체계를 완성해 <칠정산내외편>을 지었다.
그를 통해 조선은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춰 계산하게 되었다.

이천은 천문기구의 제작 책임을 맡은 과학기술자였다.
금속기술자이자 무신이었던 이천은 혼천의, 앙부일구 등 천체 관측 기구의 제작을 책임졌다.
이 밖에도 이천은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보다 50여 년 앞선 발명품이었다.

화포 등 무기 개발도 이천이 맡았다.

이 밖에 <농사직설> 등을 펴내는 등 여러 문헌 편찬을 맡았던 정초 정인지,

의학책 <향약집성방>을 지은 노중례,

지도를 만든 정척 양선지 등이 세종 시대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극적인 삶이 낳은 장영실 신화

문 교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이천 밑에서 과학 기구 제작을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며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가 장영실 고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과학사학자들은 세계 수준의 천문 이론을 독자적으로 만든 이순지나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천이
자격루와 옥루 제작만 책임졌던 장영실보다 업적 면에서 더 훌륭한 과학자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왜 일반 사람들에게는 장영실이 최고로 알려졌을까?
 
문 교수는 “장영실이 훌륭한 과학기술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의 자존심 살리기와 노비에서 출세한 드라마적인 그의 삶이 결합되면서
다소 과대포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장영실과 관련된 일부 민간단체가 ‘장영실 신화’를 확대 생산했다는 것이다.

장영실이 신화가 되다 보니 엉뚱한 주장이 마치 사실처럼 둔갑했다.
측우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이 세자 시절 아이디어를 내 만들게 했던 것인데
많은 사람은 마치 장영실 혼자 만든 것처럼 알고 있다.
문 교수는 “역사 기록에는 장영실이 측우기 개발에 참여했다는 흔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장영실이 원나라에서 귀화한 고위 기술자와 동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분명한 기록도
현재 엉뚱한 족보로 바뀌었다.

전 교수는 “세종 시대 우리 땅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이 꽃피었다”며
“장영실의 극적인 삶에 가려 있지만
세종과 함께 위대한 과학을 이뤄낸 다른 과학자들이 더 많이 조명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김상연 기자, 2008년 01월 11일 ⓒ The Science
 
 
                                                                                           
  세종시대 최고 과학자 이천
 
 
 
최근 주말 저녁에 드라마 ‘대왕 세종’이 방영 중이다.
흔히 세종대왕을 한글을 창제한 왕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정도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당시 장영실과 같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 박응서 과학칼럼니스트 ⓒ The Science

 

 
 

 

 

 

 

 과학자 세종대왕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금년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할 과학자로 세종을 선정했고
교육과학기술부는 9월 1일 이를 공고했다. 한 달 안에 이의가 없으면 선정은 확정된다.

 

세종을 훌륭한 과학자로 뽑은 것은 놀라운 소식일 수 있다.
2003년 창설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는 작년까지 25명을 모셨다.
그 가운데 10명이 선현으로 분류된다. 이순지, 이천, 장영실 등 신하가 먼저 올랐는데
뒤늦게 임금을 올리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는 의문도 나왔다.
순서는 뒤바뀌었더라도 세종을 뺄 수 없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세종이 다스린 15세기 전반 조선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세종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냈지만 특히 과학기술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시대 유럽은 르네상스가 한창이었으나 근대과학을 낳은 과학혁명은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세종은 웅대한 과학기술정책을 세우고 온 나라의 인재를 모아 과제를 맡겨 연구개발하게 했다.
그는 과학기술정책을 만들어 추진한 걸출한 지도자로 평가 받거니와 그 자신이 손색없는 과학자였다.

세종 대 과학에서 가장 볼 만한 성과는 천문학과 기상학에서 나왔다.
세종은 중국의 역법을 연구하게 해 10년 만에 칠정산을 편찬했는데
내편은 중국의 수시력을 서울의 위도에 따라 만들었고
외편은 중국에 도입된 회회(이슬람)력을 바로잡고 더욱 발전시켰다.
 
또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구(간의, 혼의, 일구)와 시간측정기구(자격루, 옥루)를 만들었다.
조선은 카스텔리보다 200년 앞서 측우기를 만들어 방대한 관측 자료를 남겼다.

고려 때 최무선이 도입한 화기기술은 세종 때 큰 발전을 보여 천자총통을 만듦으로써
중국기술의 모방을 벗어났다.
중국 농서 의존에서 탈피해 조선 독자의 농업기술을 체계화하는 노력은 <농사직설>로 결실을 보았다.

이 책에서 농기구 이름을 우리말 발음으로 썼는데 호미나 가래 같은 조선의 독특한 농구가 나온다.

지리학에서는 세종 대에 완성된 <신찬팔도지리지>와 <팔도도>의 편찬을 들 수 있다.

지도의 보완과 새 지도 제작 사업은 계속되어 세조 대에 끝난 '동국지도'로 결산을 보았다.
 
세종의 업적 가운데 국산 약재, 곧 향약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빼놓을 수 없다.
세종은 <향약채취월령>의 편찬을 명했고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게 했다.
고유의 약재와 벽촌의 경험방을 정리하고 의학의 이론체계와 연결한 책이다.
 
세종은 또 동아시아의학을 총정리하는 야심 찬 계획에 착수했다.
의학대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의방유취>의 편찬은 3년 만에 완성했으나
교정과 인쇄에 22년이 걸려 성종 대에야 간행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간 1질이 일본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세종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글(훈민정음)의 창제다.
한글 발명의 의의는 긴 말이 필요 없거니와
오늘날 한글의 가치는 인문학뿐 아니라 수학 전자공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세종은 이 하나만으로도 명예의 전당에 오를 자격이 있다.

국내 과학사학자들은 세종 대가 한국과학의 황금기였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과학사 연구의 선구자 전상운 교수는
세종 대 과학이 15세기 전반의 서유럽은 물론 아랍과 중국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격찬한다.
박성래 교수도 일본보다 2세기 앞서 서울에 맞는 역법을 완성한

세종 대 조선의 높은 천문학 수준에 주목한다.

 
15세기 한국과학의 빛나는 성공의 배경은 무엇일까?
고려 때 원을 거쳐 들어와 축적된 아랍과학이
세종이라는 빼어난 지도자의 탁월한 정책으로 한반도에서 개화한 것이다.

-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 2009년 09월 17일 ⓒ The Science

 

 

 

 

 

 

 

 

 

 

 

 

출처 :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글쓴이 : Gijuzzang Drea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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