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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松 이헌영의 blog 입니다
그룹명/宗中事 記錄物

익양공 이천 선조의 현창과 추모가 소홀함을 자책합니다.

by 우 송(又松) 2010. 7. 29.

 

翼襄公 李 蕆 先祖의 顯彰과 追慕가 疎忽함.hwp

 

翼襄公 李 蕆 先祖의 顯彰과 追慕가 疎忽함을 自責합니다.


禮安李氏 得姓以來의 翼襄公 李 蕆 할아버지는 훌륭하신 先祖의 첫 번째로 指稱하는데 아무도 異議를 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翼襄公 李 蕆 할아버지는 역사상에 뚜렷한 功績을 남김으로서

초등학생 때부터 「將軍 科學者 李 蕆」을 常識으로 간직하고 있고 

國防 또는 科學界에서 특히 尊敬하는 偉大하신 인물 이십니다


翼襄公 李 蕆 할아버지는

1985년에 政府가 先賢들의 빛나는 業績을 後世에 기릴 수 있는 顯彰事業을 展開하기 위하여 “民族文化를 빛낸 先賢” 新羅의 元曉, 義湘, 率去, 于勒, 高麗의 義天, 知訥, 一然과 朝鮮時代의 退溪 栗谷등 50인중에 科學 技術分野 10인에 選定되어 先賢 顯彰事業을 推進하고 있으며


1993년에는 政府가 4월을 “翼襄 李 蕆의 달”로 定하여 朝鮮朝 科學技術人「李 蕆」을 大大的으로 弘報하였고 文化行事로서

○ 4월 5일에 우선 禮安李氏大宗會가 主管하여 報恩 追遠閣에서 追慕祭를      모셨고

 

 

      

          1993.04.05 추원각에서의 추모제 축문 및 제례장면 (초헌관:이재충 보은군수)

○ 4월26일에 韓國 科學技術 振興財團이 主催하는 學術發表會가 書誌學 天     文學 軍史學者 傳統科學硏究者 科學著述人 科學言論人 多數가 參加하여     KOEX에서 朴星來 全相運 千惠鳳 蔡連錫博士등 科學界의 泰斗들의 學術     세미나를 開催하였고

 

                           1993.04.26 학술발표 세미나 당시 배부된 책자입니다

○ 中央科學館(大田)大講堂과 展示場에서 蔡連錫博士의 硏究主題 銃筒碗口       (로켓포)의 展示會와 “李 蕆과 國防科學技術” 映像發表會를 開催하였고

○  3월28일 禮安李氏大宗會가 “翼襄公 顯彰事業會”를 結成

    李 蕆 先生 史蹟地 聖域化事業으로 諭書閣 追遠閣 重建 丹粧, 齊舍重建,      造景및 淨化事業을 施行키로 하였으며(장기계획)

    또 政府와 陸軍士官學校의 支援아래 翼襄公 銅像建立을 長期計劃으로       施行토록 하였으며

○  李 蕆先生 失傳 墓所 探査에 대하여는

    英祖 甲申譜(1764)에 “楊洲治東地 名山北側”내용과           

    君子楊洲來 應知楊洲事 荒草北山中 先墳何處是

    養拙堂 諱 莢 敎官公(憲榮의 十代祖)께서 楊洲에 居하시는 友人 黃宗烈      에게 翼襄公墓所 探索을 當付하며 보낸 書簡文중의 詩등을 根據로

    楊洲(지금의 각심사도 양주땅?)일대에서 古冢을 探索한적도 있었으나

    翼襄公顯彰事業會가 長期事業으로 繼續 實行키로 하였고

2003년에는 科學技術部와 韓國科學文化財團이「科學技術人 名譽의殿堂」

(국립 서울 과학관에 소재)을 設立하여 처음 모신 14인중 한분으로 모셨고


심지어 國內 天文學者가 發見한 小行星 다섯 개의 별에 國際天文聯盟으로부터 承認을 받아「이천 별」이라고 命名하고 옛 科學者를 기리고 있으며

(그외에 최무선별,장영실별 이순지별 허준별등 도합 5개의 별이 있음)


이보다 훨씬 앞선 1976년에 陸軍士官學校에 科學館을 建立하며 科學館名을 「翼襄館」이라고 命名하여 生徒들에게 公의 빛나는 武人像과 科學發明 業績을 기리고 본받도록 하고 있고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에서는 先祖들이 남긴 傳統的 軍事思想과 用兵術의 硏究의 一環으로 軍史關係 옛 文獻을 發掘하는 가운데 李朝 世宗年代에 君臣이 渾然一體가 되어 北方 女眞族을 討伐한 戰史記錄 古書인

「西征錄」(서울대 규장각 보존 판본 4371호 중종11년(1516년)간행)을 國譯하여 軍事文獻集 제9호로 保存하고 軍事硏究資料로 삼고 있는데

우리 大宗會에서는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가 刊行한 「西征錄」眞本을 求得할 수 없어 어렵게 複寫한 複寫本을 大宗會에서 保存하고 輪讀하고 있음도 밝힙니다


(西征錄의 著者가 李純(之)라고 他書籍에는 記錄되어있는데 著者는 李純(之)가 아니고 著者 未詳이며 李純之는 西征錄 跋文에서“西征元師 李蕆 純爲外高王父”라고 쓴 점이 注目됩니다.

 世宗朝代의 또한분의 科學者 (德山李氏)李純之의 外高祖父가 되신다는 戚分을 밝힌데로 우리   先系에서도 確認이됩니다)


※朝鮮王朝實錄 世宗朝編 索引表에는「李 蕆」諱字가 無慮 90餘件이 있고

(檢索할 수 없는)職啣만 記錄된 史蹟까지 160건이 넘는 翼襄公 史蹟이 있는데

(朝鮮王朝實錄中 翼襄公 李 蕆 史蹟表 (憲榮 編輯) 參照)

이 史蹟內容중 많은 部分이 公께서 平安道都節制使로 北伐중에 계실 때

세종임금께서 仔細한 戰略 戰術 諭示와 長文의 戰況 報告(馳報)內容이 많은데

君臣間에 이렇게 細密하고 또 頻繁하게 長距離間에 疏通되었음이 놀라웁고

實錄과 똑같은 內容이 西征錄에도 集約되어 있음도 밝힙니다


그 외 翼襄公을 빛낸 많은 著述 冊子와 硏究論文 심지어 大學校의 敎材까지 許多하게 많은 翼襄公 記事들중에 韓國科學技術情報硏究院 (KISTI) 이 發刊한

「과학향기」에 실린 눈에 띄는 記事를 여기에 轉載합니다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난 과학자 있었다 [제752호/2008-04-30]

최근 주말 저녁에 드라마 ‘대왕 세종’이 방영 중이다. 흔히 세종대왕을 한글을 창제한 왕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정도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당시 장영실과 같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글 : 박응서 과학칼럼니스트)


※이 반갑고 고마운 기사를 보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도서관에서 「과학향기」 책자를 빌려서

복사해서 사본문을 보존할 뿐 고마우신 박응서씨는 「과학동아」잡지사의

과학기자라고만 알고 더 수소문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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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렇게 훌륭하신 先祖를 더 높이 받들어야 할 公의 20대 宗孫으로서 公의 顯彰과 追慕에 疎忽함이 猥濫되고 罪스러움은 一生의 恨으로 贖罪의 길이 없지만

中宗 己卯士禍(1519)때 公의 玄孫 從仕郞公(諱 沆)(憲榮의 16代祖) 惠民署醫學敎授公(諱 擎宗)父子분이 報恩으로 落南하시면서 그 윗대의 遺跡 墳墓 一切를 亡失한 가운데 약500년을 世居하면서 孤單하게 爲先해 온 來歷도 여기에서 알립니다. 


훌륭하신 先祖를 모신 家門에선 후손들이 그 神位를 不遷之位로 不祧廟 또는 祠堂에 모시고 면면히 이어가며 忌祭祀를 올리거나 春秋香祀를 올림으로서 어진 선조를 欽仰하고 있고

또 그 선조의 遺品 遺墨 文集등을 길이길이 家寶로 보존하며 顯示함으로서 자손들이 훌륭하신 선조를 顯彰하며 내외에 誇示하기도 합니다 만은

翼襄先祖를 封嗣해야할 20대종손은 타 家門의 列先祖 奉享을 다만 羨望할뿐 그렇게 섬길

祭廳(부조묘 사당등)도 傳統도 傳來치 못하고 있음을 恨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蛇足입니다만은 제 先祖考께서는 宗孫으로서의 具實이 能하실 識見을 갗추셨지만

地方 名望선비셨던 탓으로 弱冠30歲 前後해서 己未三一運動 蜂起 先鋒에 서시어 

1년여 獄苦를 치루신후 (獨立有功者 追敍) 그 餘毒으로 壽 쉰을 겨우 넘기실 때까지

臥病中에 계셨으니 宗嗣를 管掌하실 形便이 못되셨고

先考 亦 宗嗣에 從事할 즈음인 40前 早亡하셨으니 이때는 6.25動亂期라서 獨子인 宗孫의

絶孫이 危殆로웠을때이니 宗嗣가 順理였을 理가 없었습니다 

하옵고 제가 宗事에 눈을 뜬것은 解放되고 열다섯 나이쯤에 日帝로부터의 解放이

곧 私事 家事 國事가 如意亨通할 줄 알고 누구나 마음이 풀어저 있던때

期必 이루어야 할 生前의 遺業은 翼襄先祖의 顯彰事라고 어른들께서 서두르시던 때입니다

當時 門長어른이셨던 參奉어른(用)宅에 모이고 불리여 가고 하면서 熟議하신 結論은

○ 翼襄公 壇所를 松谷에서 馬夫로 移轉

○ 翼襄公의 實記碑 建立(翼襄公 沒後 6壬子年(1912년)부터 保存된 實記의 碑石竪立)

○ 世宗諭書를 奉揭할 諭書閣과 實記碑를 모실 追遠閣의 建立

○ 翼襄公 史蹟 發掘 (栢谷實記 編纂)

이런 등등의 莫重한 宗事가 至嚴하신 吩咐아래 각각 有司가 指名되고 役事를 力行하였으니

온 洞里 온 一家가 除百事하고 宗事에 매달렸었으니 실로 氏族의 激變期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宗財는 겨우 奉祀할 수 있는 薄土뿐이었고 집집마다 宜當 絶糧하는 貧村에서 子孫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울역해서 터를 닦고 建築에 所用할 나무를 宗山에서 베고 깎고 하며

難中難事를 그런대로 이루어서 1947년 가을에 諭書板을 奉揭할 諭書閣의 한쪽 반칸에는

六尺 烏石의 實記碑를 세운 追遠閣을 完成하여 馬夫(암소바위)齊室의 왼쪽 松林에 翼襄公의  壇所와 오른쪽의 追遠閣 竣工 告由祭에 郡內 儒林 모두 참집하셨는데

해방후 모처럼의 尨大한 爲先行事에 稱頌이 藉藉하였고,

멀리 溫陽 外岩에서 오신 參判公(貞)어른을 위시하여 參奉(用泰 用建 兄弟分)할아버지 校理公宅 鳳善(參尉)할아버지 基 宅號 옥천할아버지며 집집마다 學德 높으신 노인

어른들께서 모두 모두 壇所 廟廷에서 잔치를 베풀으시던 장면이 회상되는데...   

 

                                   이때 이룬 諭書閣과 追遠閣(1947년도 가을) 

이때 어른들께서 이루신 가장 빛나는 宗役은 단연 「栢谷實紀」의 編制이십니다

이때 할아버지들께서는 晝夜 勞心하시는게 翼襄公의 顯彰事이셨을터이니

解放 前後를 가릴것 없이 交通이란 通常 步行뿐일 때에도 郡內의 儒林 學者들께서 詩會라는 이름으로던지 자주 來往하시면서 그래도 군내 四大姓中의 하나인 禮安李氏 門中의 자랑인 翼襄公을 誇示할 唯一文書는 옛날 進士公 할아버지 養拙堂 할아버지 時代의 書簡文이나 이때 筆寫된「大學演議」에 실린 翼襄公 李蕆할아버지를 極讚하신 卞季良의 跋文이나 甲寅字의 金鑌 跋文 등등이고 敢히 朝鮮王朝實錄에 실린 許多하게 많은

翼襄公의 史蹟들은 참으로 求得과 探索이 至難할때인데 아드님이 서울에 居住한다는 참 좋은 條件 때문에 基  옥천할아버지께서 自薦 他薦되시어 보리쌀 한자루쯤 등에 메시고 上京하셨으리라...짐작되고

安東 豊山에서 올라오시면 한달 가량씩 參奉宅에서 머물으시며 畿湖學派 선비들과도

交圈하시던 갓냥 넓은 갓 쓰시고 명주두루마기에 흰 여자고무신 신으셨던 안동할아버지

께서도 奎章閣 所藏 實錄의 筆寫를 득달같히 제촉하시고 督勵 하셨으리라...여겨집니다.

栢谷實記 末尾의 編輯後記 形式으로 쓰신 옥천할아버지의 글에서도 엿보이듯

討倭 討野 造銅字 鑄馬鐵 製時計 自鳴球 正音律 頒正音 諸偉蹟이 실린 列聖實錄之貯書舘

(當時 昌慶苑내의 奎章閣)에서 萬千語를 筆寫하신 어른의 萬難을 무릅쓰신 勞心 眞心을

그냥 爲先之心으로 置簿할 수 만은 없는데...

더욱이 哀慟할 일은 이 어른께서 6.25戰亂에 서울 한복판에서 遺骨도 收拾못하게

爆死하신 일 입니다.

온 洞里의 哀悼는 勿論이었고 畢生 力作品이신 栢谷實記가 더욱 보배로운 緣由입니다

그의 자손 準台씨(1925생)는 大邱市內에 사시면서 起動이 極難하신 老軀임에도 아직까지 先代 時享에 闕參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때 韓紙 石版 兩面 印刷된 1.2卷 合卷 105쪽 單卷의 栢谷實記는 집집이 配付되어

族譜만큼 所重히 保存되었으나 이미 半世紀가 經過하였으니 殘存卷數는 알 수 없습니다

 

 

   또 要旨는 벗어납니다

저는 (淸州大)學校 다니다가 動亂中에 軍에 徵集 入隊를 하면서 宗孫 絶孫이 念慮될 때에도 어른들께서는 宗孫으로서의 責務 莫重함을 일깨우시며 무거운 짐을 나약한 어깨에 지워주셨습니다 

休戰후에 所謂 將校가 되었으니 歸鄕이 自由로울것 이라고... 春秋 時祀에 宗孫은 闕祀할 수

없다고...公州 全義 恪心嗣의 時享에 前方에서 軍服을 입고 나려오면 故鄕에서 參祀하실

어른께서 제 韓服을 갖고 오셔서 祭廳에서 바꿔입고 享祀直後 서둘러 歸隊한적도 여러번

있습니다. 

至嚴하신 吩咐에 令은 받들어야하고 春三月과 十月만 다가오면 部隊離脫할 口實 찾으며

過敏해지면서 宗事에 嫌惡感을 가젔던것도 率直히 告白합니다

軍 除隊後에 職場에 從業하면서는 宗事管掌에 몸 바첬습니다

于先 어른들께 많은것을 보고 배우며 時祀參祀와 각종 모임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해 겨울부터 大田 市立圖書館에서 稀貴한 古書 朝鮮王朝實錄을 閱覽하며 장장이 넘기며

「李蕆」翼襄先祖 諱字를 發見하면 讚嘆해 마지않으면서 한겨울을 沒頭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影印本이 아닌 石版 印刷 全紙 반절규격의(지금의 A-2규격)古冊子를

장장이 익양공 사적을 찾아서 複寫를하면서 알토란을 줍듯 오붓한 感懷를 가젔었고

그 複寫된 翼襄公 史蹟을 간추려  現代式 날자로 바꾸며 筆寫한 要約表를 만들어

보배로이 保存하였었는데...


그후 個人 家庭에서도 컴퓨터를 設置할 때 優先的으로 翼襄公 史蹟을 印刷物로 保存

할 慾心으로 컴퓨터를 배우고 設置해 놓고 終日 (한글)字板을 두들기고 하였었는데...   


제게 충격을 주는 큰 變革이 생겼습니다

88올림픽때쯤 淸州市立圖書館長이셨던 鄙派 國善大父께서 새로 만들어진 王朝實錄影印本이

圖書館에 新規備置 되자마자 새 影印本에서 「李 蕆」字가 들은쪽 全部를 複寫한

「 翼襄公李蕆先生實錄1.2권」큰 冊 두권을 製本하여 제게 갖다 준 事實입니다

原本과 따로 飜譯本이 合本된 책 두권을 보고 깜짝 놀냈습니다

비록 卷頭의 早見表에서 李 蕆자를 索引할 수 있었으니 한장 한장 넘기며 손가락 줄치며

찾았을때보단 쉬웠겠지만 그 誠心이 참으로 놀라워서 旣往 한 秩 더 만들어 大宗會에

備置하자고 권하였습니다 만은 나날이 발전해가는 컴퓨터 기술에 놀랬습니다


또 近來에는 집에 앉아서 인터넷에서 檢索하면 翼襄公 李 蕆의 史蹟을 昭詳히 알 수 있음은 물론  심지어 카페나 블로그에서도 其他 알고싶은 知識의 獲得이 쉬우니 오래전에 祖上 來歷 詳考한답시고 稀貴한 古文 原書를 낫낫이 짚어가며 찾아가지고 複寫해서 所重히 간직하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東西古今을 한자리에서 戱弄하듯 마치 科學 文物의 發展하는 모습이 어지럽기만 합니다.(大田 憲榮 拙筆 謝 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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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襄公 李 蕆 先祖의 顯彰과 追慕가 疎忽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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