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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松 이헌영의 blog 입니다
그룹명/내가 쓴 글.

친구 김동헌의 죽음을 슲어합니다.

by 우 송(又松) 2013. 11. 4.

어제 식전(11/03 08:00)에 동헌이의 아들로부터 동헌이의 죽음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병중이라서 으례 언젠가는 비보가 올 불안한 심중이었는데 갑작이 듣는 죽음 소식에 벌떡 일어나서 한참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가야지, 가 봐야지...하면서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어물 어물 그런중에도 면도하고 세수를 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미에게 이런 일로 보은을 갈테다, 부의금과 용돈좀 준비해 달라 차는 안 갖고 갈 테다... 등 오-다는 정확했고

식전이니 대충 허기를 면할만큼 먹고 불편한곳에서 철야를 해도 될 복장으로 집을 나서면서 기왕의 고생길을 단단히 작정하고

시내버스로 처음으로 가 보는 복합터미날엘 가서 보은행 표를 사니 11:10분 차라고 한다

조만간 보은엘 가게 될것이니 서둘거나 초조해 할것도 없다고 느긋하게 맘먹고 거이 한시간을 기다리면서 터미날내를 온통 살펴 봤다

옛날 옛날 나와 우리 가족들이 버스로 보은을 자주 다닐땐 속리산행 보은 경유 경북상주방면등 평균 20분간격쯤으로 직행버스가 있었는데

지금은 버스이용객이 급감하니 운행횟수도 격감할 수 밖에...교통양태가 바뀌면서 세태의 변화가 실감된다

우리집으로가는 쪽의 보은장의예식장을 찾아가자마자 동헌이의 영정과 제단앞에 서서 나 혼자 한참 호곡하였다

복인 이외 문상객이 "어이어 어이어" 하고 호곡하기는 아마 나뿐 이었으리라, 목이 메여서 음정이 이상하다고 스스로 자각하면서

 

시외 직행버스가 느리다고 탓할 생각은 없었고 차를 타고 가면서 도대체 동헌이와의 첫 인연이 언제였던가를 한참 되짚어 보았다

6.25 수복후 공비출몰로 지서가 습격당하고 하던 혼란한때에 면내 청년들이 밤에 면사무소와 지서를 지키는 출역을 할때

타동청년(?)김동헌이를 처음 만난건 확실하다, 나는 농고학생이었고 그는 고공학생일때 동원되어 숙직하던 숙직실에서

영어단어 공부를 하며 내가 그를 가르친다고 몇번 일러주다가 뒤통수를 툭 치면서 "임마 그것도 몰라?"하던때가 처음의 조우였다

그도 그때 처음 알게 되고 사귀기 시작한 사이라고 내게 여러번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그후 나는 농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고 드디어 군 입대를 하고 하는사이에 그도 만학으로 농고를 편입하고 청주농대를 다니고하던때

고교때인가 청주농대 재학때이던가 동내 처녀와 결혼을 했다고 한복차림으로 조성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건 훨씬 후의 일인데

얼마후에 본 신부가 우리 12회 동창이던 엄 누구하는 동창의 사촌여동생으로 2년후배 제일 예쁘던 처녀임을 알고 깜짝 놀랐던 일이 있고

 

군복무때 휴가를 오면 신혼시절이었던 나도 일단 장안 내려가서 그를 대려다가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놀았던 기억과

한번은 장안을 내려가서 내집 찾아가듯 사립문에서 "동헌아"...하고 불르면서 들어서니 동헌이아버지가 마당에서 왼사내끼를 꼬고 계시다가

"오늘 지금 산고젔네"하시는 말씀에 깜짝 놀래고 돌아서 나왔는데 그때 산고진 아들이 막네 동욱이를, 그후로 볼때마다 몇번이고 그 이야기를 했었다

 

충북도내 산림공무원중 그 만큼 뛰어난이가 없어서 그는 제천 단양등 산림지대로만 전근 다니다가 옥천 영동군 산림과 계장 할때는 내가 찾아다니며

둘이 술 마신적이 한 두번이 아니고 내외가 대전 우리집에도 오고 역전 "복집" 인가 하는 횟집에서 네식구가 푸짐하게 술 마신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옥천 이원의 과수 묘목원들의 시작엔 동헌이의 공이 컸을테고 그때 신품종 밤나무를 처가 옥천까지 가서 얻어다가 심기도 하였고

영동 상촌에 신품종 밤나무단지를 조성하고 동생 동우를 그곳에 옮겨 살면서 밤나무를 육성한 사실도 당시로서는 새로운 과수목 육성 농법이었다

 

5.16후에 한참 발전하던 영동군 건설과장이 출신 국회의원과 군수의 결탁으로 관내 유명산정에 불법으로 세운 종교시설이 문제가 되자

독단 부책하고 물러난사실은 당시 황폐산림의 복구와 임목육성등 주차대한 사업들이 중단되는 국가적인 손실까지도 발생했었다 

 

영동에서 보건소 간호사로 근무하던 큰딸(옥화)이 미국 거주 한씨와 결혼하여 도미한 후 큰딸 뒷바라지로 내외가 미국엘 가더니

몇해만에 미국(L A 가든그로부) 영주권을 받아 토착해서 잘 살고있을때 1991년 6월에 우리 내외도 처음으로 딸 시중때문에 L A에 도착하자마자

당장 전화를 해서 이튿날 그들 전가족 여섯식구가 달려와서 딸까지 우리셋을 가든그로브 오랜지카운티에 붓들어가서 우리 내외가 호사를 했고

며칠후에 깊은 산속에 만들어진 기도원에 나를 대려다가 그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밤을 세우면서 환영하던 일과

이튿날 첫새벽에 양아들이라고 하던 멕시칸을 시켜 잡아온 큰사슴 한마리를 일동 칠팔명이 포식하며 보신했고 그 뼈 전체를 싸 줘서 L A에서 중탕해서

딸을 보신 시키고 사위  한서방의 주선으로 한국산 승용차보다 중고 뷰익을 싼 값으로 사서 운전을 가르켜 라이센스를 따게 해주는등등 

동헌이내외의 후의 지성 성심은 생전 잊을 수 었을것이다.

 

고향(오창2구)노 부모의 봉양때문에 자주 자주 귀국하곤 하다가  끝네 영주권을 포기하고 귀국한이래 어른 내외분 작고하신이래 고향에 정착해서

아주 아주 농토군이가 돼 버린게 내가 그를 볼때마다 애석해 했었다

텃밭 농토는 수 천평 넓었고 탱자알만큼 굵게 달리는 속성 은행나무묘목을 수 천본 육묘하고 각종 과목 주목묘목등 육성이 뛰어나서

충북도지사가 직접 보고 당장 무슨 종묘원인가 면허를 발급해 주곤 했지만 늙고 병 들은 내외가 사업을 유기적으로 운영할 힘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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