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又松 이헌영의 blog 입니다
그룹명/宗中事 記錄物

[스크랩] 1451.11.08 조선의 과학자이자 무신, 이천(李蓚) 사망

by 우 송(又松) 2010. 11. 16.

1451.11.08  조선의 과학자이자 무신, 이천(李蓚) 사망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난 과학자 있었다?!

최근 주말 저녁에 드라마 ‘대왕 세종’이 방영 중이다. 흔히 세종대왕을 한글을 창제한 왕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정도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당시 장영실과 같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한겨레

 

 

 

이천(李蓚)은 다빈치에 비견되는 한국의 천재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인들에게는 명예와 자긍심을 심어주고,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예의 전당에 초대 헌정된 과학기술인 15인은 △최무선 △이천 △장영실 △이순지 △허준 △홍대용 △김정호 △지석영(추후에 제외됨) △이원철 △우장춘 △이태규 △안동혁 △현신규 △최형섭 △이호왕이다.

과학은 늘 미래를 향해 전진해 왔다. 우리의 과학기술 선현들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요구에 충실하면서 한 발 앞서 미래를 열어갔던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분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빛나는 과학전통이 있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우리 과학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말하는 이즈음 과학기술 선현들의 생애와 업적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의미 있는 것은 없을 듯하다.

명예의 전당에 있는 이천의 동판.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라고 말한 다빈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 하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도 불려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꼽는다. 실제로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건축학, 수학, 지질학, 식물학, 심지어 도시계획, 디자인, 요리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넓은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발휘했다.

다 빈치가 이와 같이 전천후 천재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보는 모든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등 특이한 성장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난 후 몇 년 동안 가장 왕성한 호기심을 보인다.

“엄마. 이건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거야?”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아빠. 아기는 어디서 나오나요.” 등등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자란 아이는 거의 없지만 유독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있다. 다 빈치가 죽은 후 30년이 지났을 때 다 빈치의 전기를 쓴 바사리는 ‘어린 다 빈치는 선생에게 끊임없이 궁금한 점과 어려운 문제를 질문했으며 때로는 선생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말했다. 부모들도 자식이 계속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해대면 화내기 십상인데 다 빈치와 부딪치는 어른들은 먼 곳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길을 피해서 갈 정도였다.

인류사상 가장 유명한 천재 중의 한 명인 다 빈치의 이러한 어릴 적 행동을 심리학자들은 전형적인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vity Disorder)’를 갖고 있는 치료하기 어려운 문제아로 간주한다. 주로 학령 전기 또는 학령기에 흔히 관찰되는 장애로서 필수증상은 주의산만, 과잉행동, 충동조절의 어려움 등을 나타낸다. 남자 어린아이가 여아보다 3∼6배 더 흔히 발생한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ADHD 아동들이 정서불안으로 감정이 급변하지만 대단히 뛰어난 특수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하며 이런 아이들을 주의 깊게 지도하라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면 아주 높은 집중력과 능력을 발휘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 빈치가 주위의 어른들을 붙잡고 ‘왜?’라는 질문을 연발해서 납득할 수 있는 답이 얻어질 때까지 계속 질문하여 어른들을 골치 아프게 했지만 다 빈치가 일반 ADHD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자연을 면밀히 관할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실험을 했다. 다 빈치가 얼마나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는지 그의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이라는 한 종류가 형성하는 행위만 해도 얼마나 많으며 다양한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으며 또 나무와 꽃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언덕과 평지가 있으며, 샘과 강, 도시, 공공 건물과 개인 건물이 있는가. 또 인간이 쓰기에 적절한 도구는 얼마나 다양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시골길을 거닐었다. 어째서 흔히 바다에서 발견되는 산호초와 식물과 해초의 흔적 그리고 조개 껍데기가 산꼭대기에서도 발견되는 걸까? 왜 천둥은 그것을 일으키는 시간보다 여운이 더 오래 지속될까. 그리고 번개가 치면 어째서 천둥이 그 뒤를 따라 이어지는 걸까. 돌이 떨어진 수면 위로 생기는 원은 얼마나 다양하며 새는 어떻게 공중에서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이상한 현상들에 대한 질문이 평생토록 내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케네스 클라크는 다 빈치를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호기심이 많은 사람’으로 평했다.

다 빈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와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최후의 만찬」을 떠올린다. 그런데 다 빈치가 얼마나 다재다능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가 후에 밀라노공이 되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일 모르의 본명)에게 자기 자신의 추천장을 보내면서 자신의 본업이 화가가 아니고 뛰어난 군사 기술자라며 10개조에 걸쳐서 그의 재주를 적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경량이면서도 강하고 분해할 수 있는 다리, 운반에 편리한 박격포, 성채 공격용 사다리, 소리내지 않고 터널을 뚫는 방법, 전차, 대포나 화약에도 견디는 힘이 강한 선박, 건물의 건설이나 수도공사,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드는 조각 등을 자신이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적었다.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해서 단지 ‘그림도 그릴 줄 안다’라고 적었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보다는 건축가나 군사기술자가 우대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모나리자」 한 점 만으로도 세계인들를 경탄하게 만드는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놀라운 전천후 천재임을 알 수 있다(그는 「모나리자」 등 12점의 그림만 그렸다).

<한국의 멀티플레이어 이천>

갑자기 다빈치에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과학 분야에서도 다 빈치에 버금가는 멀티플레이어가 있는데 이천(李蓚, 1376∼1451)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다 빈치가 개인적인 관심과 취미 차원에서 다재다능함을 펼쳤다면, 이천은 그가 담당한 분야 하나 하나가 모두 당시의 주요 국가적 과제였으며 그 모두에서 놀라울 만한 성취를 낳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부와 한국문화재단에서 2003년 1월에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공식 업적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다방면에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천은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여러 과학기술의 업적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뛰어난 무장으로서 대마도 정벌과 북방의 야인 정벌 등의 공을 세우고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15세기에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였고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화약무기 개발과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에서도 실력을 크게 발휘했다.'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잠수함 이천호(4분의1축소 모형).



세종대왕의 재위기간인 1418∼1450년은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볼 때 국책사업으로 과학기술을 선도하여 천문학은 물론 활자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물론 그 사업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한글을 창제한 것임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세종이 이와 같이 과학기술에 열성을 쏟은 것은 조선왕조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 그 배경이 있다. 고려 시대의 갈등 요소를 끌어안고 새로 출발한 이씨 왕조는 태종 때까지 실력자들의 싸움과 왕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겪었다. 세종은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어떻게 해서든 새 왕조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유교적 이념의 틀에 알맞게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를 번듯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세종이 왕이 된 1418년은 아직 새왕조가 개창된지 겨우 20여년 밖에 안된 초창기이므로 잘못하다가는 구세력의 반작용이 새 왕조의 틀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집권세력은 모든 제도를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새왕조의 권위를 높이고 그 정통성을 국민들로부터 추인 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신정부는 당시 조선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이를 개량하거나 개선하여 백성들을 계도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신정부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세울 때의 위기와 음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집권한 18년 동안 후대에 이씨조선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정리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태종은 몇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했고 심지어 자신의 처남들과 세종의 장인까지도 처치했다. 어느 정도 새왕조에 반기를 들 후환을 없애자 태종은 여러 아들 중에서 다리를 저는 셋째 아들 세종을 후계자로 세운 후 4년 간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 점이 세종 때 폭발적인 문화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된 동기라 볼 수 있다. 이 말은 세종은 태종의 배려 덕분에 권력 투쟁에 휘말리지도 않고 아무런 걱정 없이 새 왕조가 필요한 것들을 착실히 다지는 데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종이 해야 할 업무는 대내외적으로 국정에 몰두하되 남보다 새로운 것을 가능한 한 많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다 모든 일에 열성인 세종의 개인적인 취향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는 역대 왕들과는 달리 무려 32년 동안이나 왕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세종 개인의 능력과 열성만으로 발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종이 조선 시대의 여러 왕들 중에서 남다른 점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 천거되면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적의적소에 임명하여 그의 역량을 발휘토록 했다는 점이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를 보다 빨리 정착시키기 위해 소위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창안하여 국가의 모든 역량을 투입토록 했다. 이 중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사람이‘명예의 전당’에 봉헌된 이천, 이순지, 장영실이다.

이천은 무신 출신이지만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에서 지휘자이자 감독자로서, 이순지는 이론을 담당하는 과학자로서, 장영실은 실제 제작과 개발을 담당한 기술자로서 역할을 수행토록 했다. 세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세 명의 과학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분야를 전공분야로 갖고 있었다.

이천 : 천문의기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
이순지 : 이론 천문학자로서 천문의기의 이론적 뒷받침
장영실 : 천문의기를 실무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한 기술자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 추진〉

조선 초기의 무신이자 과학자인 불곡(佛谷) 이천은 무신 집안 출신으로 고려 우왕 2년(1376)에 경상도 예안(본관은 예안 이씨)에서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천의 어머니 염씨는 고려말 임금과 맞먹을 권력을 갖고 있던 염흥방의 누이동생이다. 외가는 고려말 최고의 권문세력가인 곡성 염씨 집안이었지만 염흥방의 세도가 너무 높아 비난이 많자 최영 및 이성계의 협조를 받아 염흥방을 제거한다.

염흥방의 제거로 이천 집안은 풍지박산이 되는데 염흥방에 관련된 사람은 어린아이일지라도 무참히 살해되었다(이천의 아버지 이송 포함). 마침 이천과 그의 동생 이온은 한 승려의 도움으로 산 속에 피신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년시절부터 뛰어난 무술로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인 태조 2년(1393)에 정7품 벼슬인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태종 2년(1402)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410년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합격했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 문과와 무과가 심하게 나눠져 있지 않을 때여서 그의 동생은 1401년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세종 원년인 1419년 왜구들이 충청도 앞 바다로 침입했을 때 우군첨종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다가 곧 우군 부절제사가 되어 이종무가 대마도를 토벌할 때 참가했다. 이천은 우군을 거느린 이지실을 보좌했는데 이때의 공으로 좌군 동지총제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종2품 무관급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세종 2년(1420)에는 현재로 치면 과학기술부의 차관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된다.

이천의 과학적인 재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였다. 이천은 군선의 물에 잠기는 부분이 빨리 썩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갑조법(甲造法,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군함의 선체는 크고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제조된 군선이 왜구의 토벌에 크게 기여하자 그의 과학적인 재질을 인정한 세종은 야심에 찬 국책프로젝트 중에 하나인 금속활자를 만들도록 전격적으로 공조참판에 임명한 것이다.

활자주조광경. 한국은 연활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자치통감강목』을 인쇄했다. 우리나라는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연활자의 발명국이다.



태종 3년(1403)에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바다 건너에 있어 중국 서적이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판목은 부서지기 쉽고 노동력이 많이 들며 많은 서적을 인쇄하는 것이 어렵다. 이제부터 동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고 널리 보급시키면 그 이득이 많을 것이다.”라는 어명을 받들어 활자 제작 및 출판 인쇄 기관으로 주자소가 설치되었다. 주자소는 설치되자마자 수개월에 걸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이 활자가 유명한 계미자(癸未字)이다.

계미자본과 『직지심경』을 비교해보면 활자 주조술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활자로 인쇄할 때는 고정된 청동판에 밀랍(蜜蠟)을 녹여 붓고 거기에 활자를 꽂아서 밀랍이 말라붙은 뒤에 인쇄를 시작했다. 이는 활자의 크기가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미자 역시 글자체가 크고 거칠며 고르지 못한 단점을 갖고 있는데다가 밀랍이 원래 연약하므로 활자가 쉽게 흔들리므로 인쇄량이 하루에 불과 몇 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한 것이 세종 4년(1422) 이천에 의해 만들어진 경자자(庚子字)이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해 글자가 작고 정교하며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든 것이다. 경자자에 이르러 인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인쇄할 때 밀랍을 사용하지 않아 작업 능률도 크게 올랐다. 계미자는 하루 인출능력이 여러 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자자는 이십여 장으로 늘어났다.

세종4년(1422) 10월 29일, 경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주자(鑄字)를 만든 것은 많은 서적을 인쇄(印刷)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함이니, 진실로 무궁(無窮)한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 만든 글자는 모양이 다 잘 되지 못하여, 책을 박는 사람이 그 성공(成功)이 쉽지 않음을 병되게 여기더니, 영락 경자년 겨울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이를 신념(宸念)하사 공조 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새로 글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시니, 매우 정교(精巧)하고 치밀하였다. 지신사 김익정과 좌대언(左代言)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 감독하게 하여 일곱 달 만에 일이 성공하니, 인쇄하는 사람들이 이를 편리하다고 하였고, 하루에 인쇄한 것이 20여 장에 이르렀다. (중략)이로 말미암아 글은 인쇄하지 못할 것이 없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교(文敎)의 일어남이 마땅히 날로 앞서 나아갈 것이요, 세도(世道)의 높아감이 마땅히 더욱 성해질 것이다. (중략)실로 우리 조선(朝鮮) 만세(萬世)에 한이 없는 복이다.”

이천을 보다 유명하게 만든 것은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갑인자(甲寅字)를 세종 16년(1434)에 개발했기 때문이다. 20여만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하여 빈 데를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을 채택했고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었다. 먹물도 진하고 잘 묻게 만들어 한결 까맣고 윤이 나도록 했으며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당류선생 문집』 갑인자 인본. 갑인자는 대나무로 조판해 빈 데를 완전히 메우는 조립식을 채택했고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으며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때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주조하여 병용했으며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갑인자는 이천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기술자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 낸 결실이다.

조선시대에 인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행한 라틴어 성경과 비교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성경은 총 1천2백 페이지였다. 그런데 이보다 20년 앞서 조선은 갑인자로 『자치통감강목』 5∼6백 부를 인쇄했다. 이 책의 한 권은 76페이지로 1부가 294권이므로 모두 합하면 2만2천344페이지가 된다. 이것을 5∼6백 부나 인쇄했으니 5백 부로 계산하여도 총 1천117만 페이지가 넘는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본에 비해 1만 배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또 이 시기엔 유럽에서도 과학기술서적을 활자로 출판한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사여전도통궤』 『수시력첩법립성』 『오성통궤』 『칠정산내편』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의 천문서적들과 수학서적 『양휘산법』, 선박 관련 서적 『승선직지록』, 군사서적 『진선』, 의학서적 『태산요록』 등을 이미 출판하고 있었다.

〈도량형 표준화 사업〉

일단 경자자로 조선의 인쇄술을 최고의 수준으로 향상시킨 뒤 이천은 다음 작업으로 도량형의 표준화 사업에 착수했다. 세종4년(1422) 6월 20일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했다. 이 날에 이르러 1,500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전국에 반포하고, 또 더 만들어져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사들이게 했다.”

도량형의 표준 작업은 그 후 자(尺)와 되, 말의 정비로 이어져 조선왕조의 도량형 제도 확립에 기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한 잔(盞), 한 작(爵), 한 대야(鐥), 한 병(甁), 한 동이(東海)로 계량했는데 근래까지 이 양이 얼마를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세종 때에 편찬된 전순의의 『산가요록(山家要錄)』이 2001년에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각 량의 크기가 설명되어 있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는 두 홉(合)이 한 잔(盞)이 되고 두 잔이 한 작(爵)이 되고, 두 되(升)가 한 대야(鐥)가 되고 세 대야(鐥)가 한 병(甁)이 되고 다섯 대야(鐥)가 한 동이(東海)가 된다고 기록했다. 이로 미루어 한 동이는 한 말(一斗)과 같은 분량이고, 한 병(甁)은 6되(升)가 될 수 있어 막연히 알려진 동이, 대야, 병의 계량 단위가 밝혀진 것이다. 전순의는 세종부터 성종까지의 의관이다.

〈천문의기 프로젝트를 주도〉

세종 6년(1424)에 이천은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파견되어 4개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 세종 7년(1425)에 이천은 병조참판으로 임명되고 1929년에는 중군총제가 되어 동과 철의 광산을 조사했다. 그는 동이 포함되어 있는 동석을 확인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각 광산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했고 전국 각지의 동철석을 찾아내 신고하면 양인(良人)에게는 직위를 주고 천인에게는 물건으로 상을 주어 격려하자고 주청했다.

세종 13년(1431)에 세종이 경복궁 근정전 화재에 대비하여 화재진압용 장치를 궁궐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자 그는 궁궐의 지붕에 쇠로 만든 걸이를 경복궁의 중요 건물에 설치했다. 또한 활의 개발과 병선의 개량을 위해 여러 가지 시험선을 제작하는 등 군기감의 무기 제작에 관여했고 12월에 우군도총제로 승진했다.

세종14년(1932)에 지충추원사가 되더니 상의원의 제조를 겸하면서 악공의 악기와 관복 등의 개선 작업을 담당했다..

이천이 군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지중추원사로 임명되어 악기와 관복 등 개선 작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있을 당시 세종은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우리 나라(조선)는 멀리 바다 밖에 있는 까닭에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한다. 그러나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 역산(曆算)에 관계되는 제조이니 예문관제학 정인지와 대제학 정초는 천문의기에 관한 과거의 내력과 출전을 연구하고 지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은 천문의기의 제작을 감독하라. 그러나 그 목적이 북극출지의 값을 결정하는 데 있으니 먼저 간의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

세종의 천문의기제작 프로젝트 즉 국책과학기술 프로젝트에 이천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자 이천은 세종의 명에 따라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이 연구팀에는 장영실이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가 이론을 뒷받침하여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으며 계속하여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쳔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어 냈다.

국책 프로젝트에 의해 수많은 천문기기들이 만들어지자 세종은 천문기기들을 설치하기 위한 간의대를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우도록 명령한다. 이천은 당시 호조판서인 안순(安純)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건설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의대란 한마디로 천문관측을 위한 천문대이다.  

간의대 상상도(이용삼 작도).

간의대는 높이가 9미터, 길이가 14미터, 넓이가 9.8미터인 현대식 천문대로 모두 돌로 쌓았고 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이 천문대는 원나라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연경에 세운 관성대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간의대가 건설되자 각종 최첨단 천문관측기기들이 속속 들어선다. 간의대 중앙에 주망원경 격인 간의를 설치하고 간의의 남쪽에 간의의 방향을 잡는데 필요한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을 장치했다.

간의대의 서쪽에는 규표를 설치했는데 규표는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 떠있는 하지에는 그림자가 가장 짧고, 멀리 남족에서 비스듬히 비추는 동지때 가장 긴 것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표준달력이다. 음력은 달이 12번 차고지는 것을 1년으로 삼았기 때문에 음력 1년은 354년이므로 태양력인 365일과는 큰 차이를 보여 계절과 맞지 않아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같은 문제점은 기원전 24세기 요(堯)나라 때부터 제기된 것으로 해를 관찰해서 24절기를 적용한 태음태양력이 개발되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규표이다.

세종의 학자들은 13세기 원나라 때 만든 규표를 기본으로 삼아 청동을 높이 8.28미터의 막대(表)를 세우고 땅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도록 청석을 다듬어 길이가 26.8미터인 받침(圭)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의 규표에 비해 5배에 이르는 것으로 정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규면에는 장, 척, 춘, 푼, 단위의 눈금을 새겨 청동막대의 그림자 길이로 1년의 길이(365.2425)와 24절기를 재었는데 푼(分)은 현재의 척도로 2밀리미터이다.

조선 왕조의 왕립천문대라 볼 수 있는 간의대는 세종 19년(1437) 4월 15일 공식적으로 완결된다. 간의대 서쪽에 작은 집을 지어 혼천의와 혼상을 설치했다. 연못의 남쪽에는 기계식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동쪽으로는 임금의 시계인 흠경각루(옥루)가 세워졌으며 매일 밤마다 서운관원(書雲觀員) 5명이 입직하여 천문관측에 종사했다. 이와 같은 천문관측대와 기기들은 15세기 전 세계를 통틀어 그 규모와 정밀함에서 최고의 수준이었다.

간의대 설립으로 조선 왕조는 자주적인 역법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세종 24년(1442)에 완성된 이순지 등의 『칠정산내편』은 조선에서 관측을 바탕으로 만든 조선의 역법으로 간의대와 같은 천문대와 천문의기들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작이다.

〈다시 무장으로 돌아가서도 과학기술 개발에 몰두〉

세종 18년(1436) 천문의기 제작사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고 있을 무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은 이듬해에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당시에 조선군이 갖고 있는 대완구는 너무 무거워서 싣고 작동하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중완구는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는 너무 작아서 별 성과가 없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는 화포 개발에 앞장섰다.

1437년 그가 제작한 대포가 위력을 발휘하여 야인을 크게 파하자 세종은 이천을 정헌호조판서(正憲戶曹判書)로 승진시켰다. 이때가 그의 나이 61세였다.
세종 20년(1438) 12월, 이천은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은퇴를 상언했다.

“신은 성질이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고 또한 특별한 재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상의 지우(知遇)를 입어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사오니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시 외람되이 중대한 위임을 받으니,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함으로 성상은 은덕을 갚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미가 나이 86세로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에, 아침저녁으로 깊이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신이 오랫동안 혼정신성(昏定晨省)하지 못하여서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에 부모를 그리는 정을 잊기 어렵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의 관직을 파면하시어 노모의 여생을 봉양하게 해주시옵소서.”

세종은 이천의 은퇴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질을 아껴 1443년에는 군사병기를 관장하는 군기감의 제조(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군기감으로 각종 칼, 창 등 소형무기류로부터 화포, 병선에 이르는 군사무기들을 개발하면서 특히 사용에 편리한 무기를 개발하고 표준화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복원된 규표(여주 영릉).



그가 얼마나 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는지는 당시에 환도는 칼날이 곧고 짧은 것이 급할 때 쓰기가 편리한데 당시 생산되는 환도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건의가 있자 이천은 가장 적합한 환도의 길이와 너비를 연구했다.
그는 1척7촌3분과 너비 7푼짜리 및 길이 1척6촌 및 너비 7푼의 환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도출하여 생산하게 했고 창의 길이도 연구하여 생산했다.

공격 무기뿐만 아니라 방패처럼 수비용 무기에도 관심을 보여 방패의 길이와 넓이를 확정하여 공격과 수비에 편하도록 개량하는 등 가장 적절한 무기의 표준화에 공을 들였다.

특히 이천은 야인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야포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후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 : 무쇠)로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구리 대신에 쇠로 된 대포를 만들었다.

1445년 3월 수군들을 이끌고 한강에서 수전을 연습하였다. 이천 등이 3군을 거느리는데 각 함선마다 사졸 30여 명씩 승선하고 다른 배 4척에 허수아비를 태워 적군으로 삼아 20보쯤 떨어진 거리에서 주화포와 질려포를 쏘면서 전투를 시연했다. 이천은 단지 병기나 의기 등의 제작 책임자에 머물지 않고 장수로도 큰 활약을 한 전천후 인물이었다.

이후에도 이천은 세종의 만류로 관직에 계속 머물면서 화포의 제조에 남은 생을 전념하던 중 어머니의 상(喪)을 당했으나 이때 세종이 승하하여 세종의 능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한다. 이후 이천은 문종 원년(1451)에도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들어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문종도 이천의 청을 거절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한 후 궤장(지팡이)을 하사했다. 궤장은 국가에 공헌한 나이가 많은 공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영예로운 하사품이다. 그러나 궤장을 하사받은 지 얼마 안된 1451년 11월에 7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정부에서 치루었으며 사후 익양공(翼襄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익양이란 매사에 사려가 깊고 모든 일에 매우 뛰어난 공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문종실록』의 졸기(卒記, 국가에 공헌한 인물에 대해 그가 죽었을 때를 기념하기 위해 실록에 적는 글)에 그의 과학 기술적 업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호(諡號)를 익양(翼襄)이라 하니, 사려(思慮)가 깊고 먼 것을 익(翼)이라 하고, 갑주(甲胄)의 공로가 있음을 양(襄)이라 한다. 천성이 정교(精巧)하여 화포(火砲)·종경(鍾磬)·규표(圭表)·간의(簡儀)·혼의(渾儀)·주자(鑄字)와 같은 따위를 모두 그가 감독하고 관장하였다.’

왜구의 토벌과 북쪽 오랑캐의 정벌, 인쇄술의 향상과 도량형의 표준화, 천문의기 제작 등 무인과 과학자로써 화려한 생을 펼쳤던 이천은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한 조선초기의 대표적 과학자요 기술자로 볼 수 있다. ‘기술자 장군’이었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는 1977년 이천의 시호를 따라 익양관(翼襄館)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을 이천호로 명명했다.

 

 

/공감코리아

 



 

 

이천 (李蓚) 

이 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도 틈틈이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더 아름다운 자체(字體)와 인쇄 능률을 높이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甲寅字)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병선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갑조법(甲造法), 즉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참고문헌≫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6)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