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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석 칼럼.

by 우 송(又松) 2005. 2. 21.

[최우석 칼럼] 해외서 본 어제와 오늘의 한국

설 연휴를 이용해 중국에 다녀왔다. 인천공항과 청두(成都)직항기는 단체여행객으로 몹시 붐볐다. 청두공항은 인천공항만큼 크게 잘 지어 놓았다.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에 대비해 중국은 도시마다 공항과 인프라 시설을 확충하고 있었다. 관광지엔 갓 지은 고층호텔과 쇼핑센터가 즐비했다. 몇 년 전에 비해 특히 길이 넓어지고 화장실이 좋아졌다. 중국의 이름 있는 관광지엔 한국 여행사 깃발과 가족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중국은 아직 물가가 싸 한국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기념품 가게마다 "한국 돈 천원, 천원"하고 외친다. 천원이면 모자 하나, 지팡이 하나, 파인애플 두 개씩을 살 수 있다. 만원이면 큰돈이어서 큰 인형이나 좋은 목도리를 살 수 있다. 한국 관광객들을 잡기 위해 서툰 한국말로 계속 "싸다 싸다"를 연발하며 따라다닌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오랜 중국과의 관계에서 요즘처럼 한국 사람들이 대접받은 적이 있었을까. 역시 나라의 경제력이 있고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30년 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1970년대 말에 처음 유럽에 갔는데 그땐 상사주재원 말고는 한국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더러 서독 광원이나 간호사로 왔다가 주저앉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대학을 나와도 국내에선 취직이 안 되니 급조 광원이 되어 해외로 나갔다.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조선족이나 동남아인들이 하는 것처럼 낯선 이국땅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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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교포간담회에서 이들 광원.간호사와 붙잡고 같이 울었다 한다. 설움과 반가움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무척 가난해 대통령도 상업 여객기 타고 차관을 얻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외국으로 갔다. 유럽에 갔을 땐 이들 광원이나 간호사가 독일에서 막 생활 기반을 잡기 시작하거나 일거리를 찾아 다시 미국으로 갈 무렵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나라 걱정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송금했다.

그때 유럽을 거쳐 중동으로 갔다. 한창 중동 건설 붐이 불고 있어 비행기엔 일하러 온 노무자들이 많았다. 검게 탄 얼굴에 손이 거칠었다. 바레인 공항에 그들과 같이 내렸는데 모두들 영어로 된 입국신고서를 앞에 놓고 난감해 했다. 10여장을 대신 써주고 뒤늦게 허둥지둥 내린 기억이 있다. 투박한 손을 잡고 돈 많이 벌라면서 작별인사를 할 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중동은 40도가 넘는 더위였다. 현지 사람들은 한더위를 피해 일을 하고 해만 지면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 노무자들은 점심을 서둘러 먹고 밤엔 횃불을 켜고 일을 했다. 이왕 나온 김에 시간외 수당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다. 그래서 공기도 단축하고 일을 잘해 중동에서 환영받았다. 이들도 이제 육십 노인이 됐을 것이다. 젊었을 땐 몰라도 지금 나이가 되면 열사의 땅에서 무리하게 일한 후유증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옛 고생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한국 사람들이 돈을 쓰며 해외관광을 다니게 되었다. 한국이 먹고 살 만하니 그 은덕이 중국에 있는 조선족에게 미치는 것 같다. 중국에 한국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고 관광객이 늘어나니 한국말을 하는 조선족의 시세가 크게 높아졌다. 그래서 만주 쪽 동북삼성(東北三省)에 모여 살던 조선족들이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이젠 상하이(上海).청두는 말할 것도 없고 쿤밍(昆明)이나 하이난(海南)까지 뻗쳐 있다 한다.

한국말을 하는 조선족 가이드가 수입이 높아 중국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흐뭇해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통 한족(漢族)들이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부러워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인 일이다. 조선족 가이드가 관광버스를 타고 가면서 빠지지 않는 말이 한국이 잘 사니 무척 자랑스럽고 좋다는 것이다. 중국도 요즘 열심히 경제개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은 덩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마도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한테 배운 것 같다는 것이다. 한국이 경제개발을 잘한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이나 잘 벌고 잘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한국 경제가 안 좋다고 하던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자신들의 높은 수입과 한국인들에 대한 융숭한 대접이 달라질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2005.02.20 18:30 입력 / 2005.02.21 08: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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