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싸운(전투)이야기
공병동우회지 (공우)에 제출할 원고입니다
오래전에 쓴 "내가 겪은 6.25"의 수정판 입니다.
▲cal30 경기관총
▲ BAR 자동소총
남자들끼리는 으례 군 복무하면서의 각가지 일화를 많이들 이야기 하지요
죽이 맞는 끼리끼리 모이면 화제의 제일 우선순위가 군 복무 때의 이야기입니다
심빠람 나게 이야기하던 그 입담으로 애인(여자)들에게 이야기 했다가는
또 또 그 군대이야기냐고 핀잔들은 기억도 많이 간직하고 있을 줄 압니다
군대 이야기 중에도 6.25전쟁 때 적과의 전투 이야기는 가장 리얼하고 실감 나는
이야기꺼리였는데 지금은 실전을 겪은 이도 또 치열했던 전투장면을 들어 줄 사람들도
점점 희소해졌습니다, 다만 옛날에 이 땅에 그런 불상사가 있었느니 라고 기억할 정도로,
노병들의 전투 경험담은 끼리 끼리나 주고 받을 화제이지 한외자는 몸서리를 치면서 잔혹하다고
화제를 중단시키고 대화를 피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생사를 가른 치열한 전투를 겪은 참전용사들은 생전 잊을 수 없는 혹독한 전투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새록 새록 회상되고 어떨 때는 잠자리에서 그 흉측한 망상이 떠올라 잠을 설치고 백야로 지 세우는 경우도 허다한데요
내가 1952년초에 (청주)대학 재학중 군에 징집되어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보병8사단 16연대 2대대 7중대에 배속되어 신병 일등병으로 동부전선 진부령 향로봉 일대 방어전투에 투입되어
처음 최 일선에서 주야간 경계하면서도 단 한 번도 전투를 하거나 접적 사격을 해 본적 없는 피 아 교전 없는
소강상태로 참으로 쉬운 최전방 근무를 한달쯤 하니 전방근무라는 것이 마음에 고롬하고 자신감이 생길 즈음
보병 수도사단과 진지교대를 해서 화천지구의 최전방 격전 지구에 투입 되었습니다.
지금은 인민공화국의 영토인 화천 전방 수도고지(주소지 미상)의 전투는 6.25전쟁 중 치열했던 격전지로
전사(戰史)상 기록이 있을 만큼 많은 희생을 치룬 혹독한 전투를 치루었는데 같은 시기에 육군 9사단이 치룬
백마고지는 물론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지켜낸 값진 대한민국의 영토임으로 전사에 빛나고 격전지로서
기리 보존되면서 수호한 9사단의 영예 또한 찬연하지만...
수도고지 전투를 위하여 수도사단과 진지교대를 한 보병8사단이 1952년 초여름 심야에 (일자미상) 수도고지에
진주할 때 적에게 노출 발각될까보아 당연히 극비리에 야간정숙보행으로 산을 오르자니 지형지물을 알 턱이 없고
수도고지 산악 전체가 험준한 바위산임에 피아의 포 사격으로 바위산이 골재적재장같이 자갈무더기에 기어오르기가
극난하였는데 정상 진지에 가까워 가면서 생전 처음 맡는 극심한 악취가 또한 크게 괴로웠던 생각은 지금까지
잊혀 지지를 않습니다
날이 훤히 새면서 정상 주저항선(O P)일대를 살피니 적 방향으로 당연히 설치되었어야 할 교통호가 전무 하였습니다,
바위산에 교통호를 팔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대에 돌 자갈을 담아 한 줄로 쌓아 놓은 것이 교통호였고
소대 당 한곳의 마대로 쌓아 철주로 지붕을 덮은 것이 초소(지금 군사용어 소초)였습니다.
날이 밝으면서 주위를 살피던 고참 선임병 들과 신병 전우 병사들이 단연 아연 하였습니다
지독한 악취는 얼마 전에 적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적 전사자의 시체 더미에서 발산하는 악취일터이고
주저항선에서 당연히 포복자세인데도 퓽~ ~하고 날라오는 적 저격수의 조준사격에 벌써 두 병사가 뒤통수를 맞고
즉사하는 상황에서 . . .제법 전투지에 익숙했을 신병들은 처음 겪는 장면에 겁을 먹기 시작 했습니다
소대장 선임하사 분대장 선임병들이 신병들을 얼르고 달래면서 격려하고 사기를 올리지만
정신을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넋을 잃고 혼이 빠저 정신이상자가 나올 수 있는 경우 이었습니다.
(실제로 얼이 빠진 정신 이상 신병 발생자 다수 목격하였음)
그후 얼마간 전투경험을 쌓고 상황에 익숙해지니 사상자가 발생하면 전우애의 발로인듯 서로 먼저 들것을 들고
후방으로 후송할려는 현상은 잠시라도 전투지역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 때문 이었고 심지어 전사체나 사경을 헤메는
전우의 주머니에서 저에게는 없는 미제 스푼을 꺼네서 제 주머니에 집어넣는 괴력도 생겼고요,
또 어젯밤 낙하한 조명탄의 낙하산 주워 모으는 재미로 지뢰지대에도 성큼 성큼 들어가는 담력도 생겼습니다,
지금의 외출 외박과 같이 탄착지점 외에 있는 취사장에를 한번 내려가는 행운을 잡으면 전 소대원의 수통을
전부 모아 갖고 가서 식수를 떠다 바치는 불문율이 있고 모처럼 세수다운 세수를 하고 깔끔하게 머리를 감고
다듬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본인 경험자의 추리이지만 아마도 다수 참전 군인들이 90세 이상의 장수를 누리는 경향은 과거 전투 시에 생긴
강인한 정신력과 담력을 소지케 되었음으로 고통과 질병을 극복하는 우수한 정신력을 가진 연유인 듯도 합니다.
반대로 최근 많이 회자되는 공황장애 공포증 등 정신적 질환의 급격한 유행은 현대인들은 고난을 극복할
정신력이 나약함으로서 정신과적 잡병이 다수 발생하는 경향으로 봅니다
지금 사람들은 포시라운 환경에서 나고 호의호식하며 고생을 모르고 자라나서 강한 정신력 인내력은 전혀 생길 수 없고 어려움을 당하면 푸석 주저앉는 나약하고 비겁한 정신 소유자를 양산하는, 어찌 보면 국가의 미래와도 밀접한 관련 있는 중대사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인격과 성격형성에 중요 계기가 되는 중요시기인 군 복무기간에도 소위 민주군대라는 선량한 제도(?)아래 군인의 인권이 엄격히 강조되고 있고 이제는 일과 후엔 전방 장병이 휴대폰으로 마음대로 통화도 할 수 있는
자유도 부여되었다니 일과 후에 엄마에게 전화하며 “엄마 엄마 오늘 또 그새끼한테 얼차려 당했어 단체로 토끼뜀하는데 주-글뻔했단 말이야 이다음 면회와선 그새끼 않 그러도록 어떻게 좀 해 줘 응?. . .하는 공개적 로비가 이루어지리라고 짐작 되는 이유는 전방부대 아들 면회 간 엄마가 부대내 식당에서 아들이 먹는 세끼 식사를 아들과 마주 앉아 시식해
보는 , , , 참으로 민주 군대를 위하여는 각급 부대장이 경쟁적으로 부대 사병의 민주적 생활(복무)를 도모함으로서 진급에 영향 미치는 좋은 고과성적을 얻는 제도 아래에서 강한 군대가 만들어 지는 것인지 부대마다
”필승“을 모토로 하는데 이런 민주군대가 필승할 군대가 되는 것으로 알고 국민은 군을 믿고 있을 수 밖에 없잖습니까?
수도고지에 여름에 주둔하여 한겨울을 맞으면서 반년이상 격전을 치루면서 노련한 전투원이 된 나는 처음 신병때 부터 소대에 한자루 뿐인 BAR(자동소총. BROWNING AUTOMATIC RIFLE?) 사수가 되었습니다.
사실인즉 당시 대부분 국문해득 학력소지자 병사들 보다는 대학생(이름대신 불리워진 내 이름)병사가 소대장으로부터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역병 면제등 특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탄창에 실탄 15발을 장전하고 무한량으로 탄창을 사대에 둘 수 있음으로 밤 새도록 사격을 하여도 마음 놓고
쏠 수 있어서 좋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탄창에 실탄을 장전하면서 예광탄은 장전치 않음으로서 사격시 적에게
위치 노출을 방지하는 지혜도 발휘하여 중대장에게 칭찬 받고 전 중대내의 모범사병이 되었지만 능난한 솜씨가
있다고 인정되어 중대내의 전사자 또는 표창 상신자의 공적조서는 수 도 없이 썼지만 본인은 훈장은 고사하고
단 한번의 표창도 받지 못한 것이 그후 60년이 지난 지금은 사후의 처우에 까지도 큰 차이가 있는 아이러니속에
다만 군 복무중 지금은 다 잊어먹은 무운장구(武運長久)하여서 오늘을 맞이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잖는가 자위하고
있습니다.
보병전투소대에서 가장 미더운 기관총은 화기소대에 한정뿐이었는데 소대의 전투구역 중심요지에서 전 소대원의
사격을 엄호하며 소대 정면으로 적군의 진격을 단독으로 저지하여야 함으로 전 소대원으로부터 존경에 가까운
믿음을 받았고 또 BAR 자동소총도 사수인 나와 함께 기관총만큼 사랑을 받았습니다,
행군시에는 소총수가 대신 메어다 줄 정도로요.
최근에는 전쟁기념관을 포함해서 많은 총포 전시장을 관람하여도 사랑스럽고 애착이 가는 수냉식 기관총의 전시물은
못 보았습니다. 물론 성능 좋은 신무기로 대체된 까닭이겠지요.
같은 기관총이지만 수냉식 기관총은 공냉식 기관총보다 성능이 훨씬 좋았습니다.
장시간 사격에 총열 냉각수통이 과열하여 뿌글 뿌글 별 소리가 다 나곤하지만 수냉식은 밤 새도록 사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간 전투중 빠르륵 귀 따가운 소리를 내는 공냉식 기관총보다 통통통 부드러운 총성이 나는 수냉식 기관총이 훨씬 전투원들로부터 믿음을 받았습니다.
어둠이 깔리면 차출된 척후병이 철책선 넘어가서 잠복하고 있음으로 래습하는 적병력의 정황을 미리 알게 되어
불의의 초동 기습사격으로 신나게 격퇴하고 전과를 올린 사례도 많았지만 밤 새도록 끈질기게 밀고 오는 파상공세에는 초 긴장해서 밤 새도록 사수 조수가 교대하며 쏴 대서 정신이 어리벙벙 혼미해 지고 귀가 멍멍해서 자칫 쓸어질
단계에 이른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멍멍해진 바른쪽 귀의 청력이 지금은 먹통이 되었습니다만)
교전중 수냉식 기관총이 냉각수통 탄통교환등 일시 사격 중단때는 BAR이 소대 정면을 엄호함으로 소대원들로부터 유능한 사수로 믿음과 존경 받던 사수였는데 이렇게 유능한 전투원으로 믿음 받은 나는 우리 7중대 전투지휘소에서 작전중인 포병 관측장교의 크나 큰 도움을 잊지 못합니다. 주간에 7중대의 정면에 집중 포화를 퍼 부을 탄착망을
미리 관측 기록해 놓았다가 야간 전투시에 적군이 우리 정면에 침투시에는 관측장교의 사격지휘에 따라
집중포화를 퍼 부어 주니 적군의 패퇴는 물론 나는 관측장교에게 달려가서 감사의 포옴을 하곤 하였었습니다,
이래서 우리 7중대에 배속된 포병 관측장교는 비록 장 사병간이지만 나와는 친구같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었습니다.
그래서 한 낮 한산할 때는 나는 관측장교와 거이 함께 기동하였었는데 어느날 관측호속에서 당번병이 참호속
탄통 난로에 유일한 땔깜 장약봉지를 던져 넣은 것이 일시에 폭발하여 관측호가 날라가고 관측장교와 당번병 둘이
함께 폭사하는 참상을 겪으면서 나도 곧 따라 죽을 것 같은 정신착란과 함께 완전히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수도고지 전투는 멀-리 좌전방 가맣게 보이는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 상황에 비하면 격전이 아니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비록 포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날마다 주야 24시간의 격전이었습니다
잠시도 쉼 없이 총포탄의 섬광이 교차하였으니까요.
주간에는 사뭇 적진과 9사단의 전투지역 사이 개활지에는 흰 구름(포연)이 하야케 드리워져 있고 야간에는
예광탄과 조명탄의 불 줄기가 밤 새도록 휘황찬란하였었으니까요.
6.25전쟁중 가장 많은 총포탄등 전쟁물자가 소비된곳이 백마고지이었다고 백마고지 전쟁기념관에서
설명을 보았습니다.
수년 전에 백마고지 기념관을 참관할 때 멀리 멀리 동쪽으로 가맣게 보이는 공화국 땅 수도고지 전적지와
대성산 일대를 향해서 수 없이 여러차례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나와 함께 전투하다가 전사한 전우들이 백골은 진토가 되고 영혼은 북녁땅에서 무주고혼이 되어 바람에
흣 날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었습니다.
나는 수도고지에서 인연 맺은 세분 장교를 잊을 수 없습니다
7중대장 김정환대위님, 부관 임철호중위님, 현장 즉사를 목격한 관측장교 포병 이소위님!!
밤마다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한가로운 한낮에는 참호밖 양지볕에서 햇볓을 쬐면서 등허리에 굼실거리는 이를
서로 잡아주고 등을 긁어주고 하면서 “어젯밤 전투에서 기어오는 놈을 집중 사격해 사살하면서 나도 문득 생명의
애착을 느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삼대 독자이니 대가 끊어지리라고 문뜩 생각났었습니다”라고. . .
무심코 들었을 부관 임철호중위님이 그 며칠후 “이헌영 빨리 사단사령부로 내려가라” 간부후보생 추천했는데
1월1일 광주 상무대 육군보병학교 도착하라고 명령 내려왔다“고 서둘러 철모를 벗기고 탄띠를 클러주고 하면서...
신고도 할 것 없고 두서도 없이 뒤돌아보며 손 흔들고 수도고지를 미끄러지며 굴러 내려오면서
“여기만 내려가면 나는 6개월은 산다”고 휘달려 내려온 것이 어언 66년전인데.
나는 1952년 말일(12/31일?)에 서울에 와서 1953년 1월1일 광주 상무대 육군보병학교에 도착해서 1월2일
보병학교 갑종간부 48기 (M중대)로 입교하고서 엊그제 수도고지에서 삶과 죽음의 가름에서 헤매던 끔찍한 환각 때문에 자칫 낙오될 위험 속에서도 마음 진정이 어려웠으면서도 혹한속 심야 단체기합중 맨몸으로 어름물속에 뛰어드는 혹독한 체벌도 능히 견딘 정신력은 전방 전투장면을 연상하면서 쉽게 넘기곤 하였는데
다시 김해공병학교 공병40기 간부후보생 교육 중에 수도고지 패퇴 소문 듣고 부산으로 외출해서 5육군병원에
입원치료 중이던 수도고지 전투중 부상자 다섯 전우를 문병하며 함께 껴 안고 눈물 흘리며 그래도 우리는 살아서 천행이라고... 이헌영 너 떠나고 얼마 후에 ‘수도고지 우리 중대 다 죽고 뺏겼다’ 고 양지절단 전우가 울부짓는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벼락 치는 소리로 정신이 얼얼하기만 하였습니다. (끝)
이 헌 영 (공병 40기) 대전광역시 유성구 어은로 57 한빛아파트 137/107호 (010-5226-0850)